패션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아웃도어 기능성 웨어가 일상복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트레일 믹스를 뜻하는 ‘GORP’에서 파생된 ‘고프코어(Gorpcore)’는 하이킹·캠핑 등 아웃도어 기능성 웨어를 일상복으로 끌어들이는 패션 무드를 일컫는다. 그리고 지금, 그 흐름의 중심에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있다.
노스페이스·파타고니아 같은 글로벌 아웃도어 공룡이 고프코어 붐의 첫 수혜자였다면, 2020년대 중반의 국내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케일, 산산기어, 고요웨어, 웰터 익스페리먼트, 루트파인더 등 낯선 이름들일 수 있지만, 10·20대 패션 커뮤니티에서 이 브랜드들은 이미 하나의 ‘문화 코드’로 통한다. 이들은 아웃도어 웨어를 넘어 기능성과 디자인, 그리고 라이프스타일을 아우르는 새로운 패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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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하이커의 경험에서 출발해 기능성과 미니멀 디자인을 결합한 국내 고프코어의 선구자, 케일(CAYL) |
고프코어의 시작점, 케일의 확장
산악 스포츠 애호가 이의재가 2011년 창업한 케일(CAYL)은 국내 고프코어 씬의 선구자 격이다. 하이킹팩·슬링백 같은 기어류부터 플리스·윈드 재킷·팬츠까지 풀 카테고리를 전개하면서도, 실루엣과 컬러는 철저히 도심 일상복과 혼용할 수 있는 미니멀·톤다운 무드로 잡았다. 무게와 내구성을 동시에 잡은 기능성 원단 선택, 실용적인 포켓과 스트랩 설계는 실제 산을 오르는 이용자의 목소리를 반영한 결과다.
브랜드명(Climb As You Love의 약자)에서 알 수 있듯 ‘산에 진심인 브랜드’라는 정체성은 MZ 하이킹·트레일러닝 커뮤니티에서 강력한 팬덤을 만들었다. 뉴발란스와 2021년, 2023년 두 차례 협업한 컬렉션은 국내를 넘어 일본·미국·호주·프랑스 아웃도어 편집숍 입점으로 이어졌다. 케일은 협업을 단순한 마케팅이 아닌 브랜드 철학을 확장하는 채널로 활용하며, 산에서 출발한 브랜드를 세계 도시의 라이프스타일 무대로 확장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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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디테일과 스트리트 감성을 결합해 고프코어를 패션 문화로 확장한 대표 브랜드, 산산기어(SAN SAN GEAR) |
웨이팅 열풍이 쏘아올린 산산기어의 질주
2019년 서울에서 출발한 산산기어(SAN SAN GEAR)는 국내 고프코어 붐을 상징하는 대표 브랜드 중 하나다. 기능성 원단과 구조적인 패턴, 스트링·포켓·지퍼 등 테크 디테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뉴트럴 컬러와 입기 쉬운 실루엣으로 진입 장벽을 낮췄다. 특히 와이드하고 입체적인 팬츠는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고프코어 커뮤니티에서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는다.
브랜드의 전환점은 하이츠스토어 프리뷰였다. 현장에서 긴 웨이팅과 빠른 품절이 이어지며 산산기어의 존재감이 패션 커뮤니티 전반으로 확산됐다. 작업 장갑이나 오브제성 아이템 등 실험적인 주변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단순한 패션 브랜드에 머물지 않겠다는 방향성도 드러냈다.
이상엽 디렉터를 중심으로 디자인팀과 크리에이티브팀이 함께 이끄는 산산기어는 2025년 10월 푸마와의 글로벌 협업 컬렉션 ‘FULL THROTTLE’을 공개하며 스니커즈·어패럴·액세서리를 아우르는 라인업으로 다시 한 번 씬의 주목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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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과 도시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며 절제된 디자인과 실용적 기능성을 결합한 라이프스타일 아웃도어 브랜드, 고요웨어(GOYOWEAR) |
조용하지만 강하다, 고요웨어의 기능적 미학
이름처럼 ‘고요’한 브랜드, 고요웨어(GOYOWEAR)는 화려한 퍼포먼스보다 꾸준한 완성도로 팬을 모은다. 방풍·발수·스트레치 같은 테크니컬 기능을 캐주얼한 실루엣에 녹여낸 재킷·후디·팬츠가 주력이고, 카키·블랙·딥그린 등 자연계열 컬러가 전체 팔레트를 지배한다. ‘일상에 스며드는 편안함’이라는 브랜드 철학은 제품 설계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산산기어나 케일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이미지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다운·플리스 보온 아이템의 높은 완성도와 활동성 좋은 패턴 설계가 주요 강점으로 언급되며, 하이킹 입문자와 라이프스타일 아웃도어 유저 사이에서 첫 고프코어 브랜드로 자주 추천된다. 기술적 디테일과 캐주얼 요소를 함께 담아 트레킹부터 도심 고프코어 룩까지 폭넓게 어울리는 것이 이 브랜드의 가장 큰 경쟁력이다.
기능과 일상 사이를 실험하는 웰터 익스페리먼트
2021년 어반시티가 론칭한 웰터 익스페리먼트(WELTER EXPERIMENT)는 이름 그대로 ‘실험’을 브랜드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국내 테크웨어·고프코어 씬에서 주목받고 있는 브랜드다. 방수·발수 기능의 퍼포먼스 원단에 유틸리티 디자인을 결합한 아우터·베이스레이어·팬츠가 주력이며, 기능성과 일상성을 동시에 고려한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특징이다. 밀리터리와 스트리트 감성을 기반으로 티셔츠 8만 원대부터 다운 재킷 40만 원대까지 비교적 넓은 가격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하이킹 클럽 등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필드 경험을 제품 개발에 반영하는 방식도 차별화 요소다. 최근에는 대만 편집숍 화이트락 입점을 계기로 동아시아 시장으로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으며, 여성 소비자 확대를 위한 다양한 컬러 도입과 여성 사이즈 스펙 개발도 본격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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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성 소재와 유틸리티 디자인으로 필드 경험을 제품에 녹여낸 웰터 익스페리먼트(WELTER EXPERIMENT) |
아웃도어의 새로운 방향, 루트파인더의 탐색
루트파인더(ROOTFINDER)는 조금 더 특수한 결을 가진 브랜드다. 2019년 패턴 메이커 출신 김표상 대표가 론칭한 이 브랜드는 3D 의상 설계 프로그램을 활용한 스포츠 테일러링과 입체적인 벌룬 실루엣이 트레이드마크다. 밀리터리 베이스의 정통 아우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인체 움직임 연구를 바탕으로 한 입체 패턴을 적용한다. 탐험과 발견의 태도를 디자인 철학으로 삼아 기능성과 구조적 미학을 동시에 추구한다.
모듈형 탈부착 후드, 투웨이 팬츠처럼 하나의 아이템에 여러 기능을 담아내는 설계도 루트파인더만의 개성이다. 팬츠와 셔츠 25~30만 원대, 퀼팅 재킷 30만 원대 중후반의 가격에도 불구하고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라는 고프코어 팬층의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3D 설계에서 비롯된 높은 완성도는 착용 후에야 비로소 체감되는 포인트로 마니아를 만드는 루트파인더만의 힘이다.
트렌드를 넘어 생활로, 고프코어 씬의 확장
고프코어 씬은 여전히 팽창 중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아웃도어 기반 도메스틱 브랜드들이 꾸준히 등장하며 시장의 저변도 빠르게 넓어졌다. 대형 유통망과 글로벌 브랜드의 공세 속에서도 이들 소규모 레이블이 존재감을 유지하는 이유는,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 기능과 디자인으로 승부하기 때문이다.
이들 브랜드의 공통점은 ‘직접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만든 옷’이라는 데 있다. 하이킹과 트레일을 기반으로 하지만 도심 고프코어 룩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실루엣을 구사하고, 실사용 경험에서 출발한 기능 설계와 현장 ?풩亮湧?반영한 소재 선택을 중요하게 여긴다. 땀을 흘려본 사람이 만든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의 차이는 입어본 사람만이 안다. 포켓의 위치 하나, 밑단 처리 방식 하나에서 그 차이가 드러난다. 소비자들 역시 그 차이를 이미 감지하고 있다.
여기에 커뮤니티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고프코어 씬은 단순히 옷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다. 함께 트레일을 걷고 팝업에서 만나고 SNS 피드가 아닌 실제 산길에서 서로의 레이어링을 확인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브랜드는 그 커뮤니티의 구심점이 되고 소비자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닌 씬의 참여자가 된다. 이들의 관계는 어떤 마케팅보다 단단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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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D 패턴 설계를 기반으로 인체 움직임을 고려한 구조적 실루엣을 구현하는 실험적 아웃도어 브랜드, 루트파인더(ROOTFINDER) |
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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