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크퍼 시대, ‘리얼퍼’를 대하는 슬기로운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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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의 K패션, 세계를 입히다 48

2026-02-06 오전 1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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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퍼든 페이크 퍼든, 중요한 건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다.



요즘 패션 업계에서 리얼 퍼를 이야기하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다. 동물 복지, 지속가능성, ESG 경영이라는 키워드가 산업 전반을 재편하면서, 리얼 퍼는 마치 시대착오적 선택처럼 취급되고 있다. 많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리얼 퍼 사용 중단을 선언했고, 페이크 퍼는 이제 하나의 '윤리적 정답'처럼 유통된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윤리적 선택지가 명확해 보이는 지금, 여전히 리얼 퍼를 다루는 사람들은 단순히 시대를 거스르는 고집쟁이들일까? 지난주 만난 퍼스토리의 김경찬 대표는, 그 답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퍼스토리는 국내 주요 패션 브랜드들에 리얼 퍼를 납품하는 회사다. 국제 경매를 통해 직접 원단을 구매하고 디자인부터 제작, 품질 관리까지 전 과정을 책임진다. 단순 유통이 아닌 '만드는 회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경찬 대표가 있다.


"없어질 거라면, 이미 없어졌겠죠"


김경찬 대표의 첫 마디는 조심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30년 가까이 이 업을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정하고도 현실적인 인식이 담겨 있었다. 리얼 퍼는 이미 수십 년간 여러 차례의 비판과 논란을 겪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건, 단순히 관성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리얼 퍼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소재 자체가 가진 물성의 차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천연 소재가 주는 보온성과 촉감, 무게감은 완벽히 재현되지 않는다. 페이크 퍼는 분명 발전했지만 여전히 '비슷한 것'일 뿐 '같은 것'은 아니다.


둘째, 수요는 줄어들 수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리얼 퍼 사용을 중단했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는 소비자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선택지가 줄어들면서, 정말 퀄리티 있는 제품을 찾는 소비자들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셋째, 산업 자체의 투명성과 책임이 과거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김경찬 대표는 "예전처럼 아무 곳에서나 퍼를 가져오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지금은 국제 경매를 통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원단만을 사용하며, 그 과정 역시 투명하게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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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퍼 회사


퍼스토리가 흥미로운 건, 전통적인 산업을 다루면서도 사고방식은 놀랍도록 열려 있다는 점이다. 김경찬 대표는 리얼 퍼를 고수하는 동시에 산업 구조 자체를 혁신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중 하나가 비트코인을 활용한 자체 결제 시스템 구축이다. 그는 "결제 시스템 하나만 바뀌어도 거래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했다. 중간 수수료를 줄이고, 국제 거래를 더 빠르게 처리하며, 궁극적으로는 고객에게 더 나은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런 시도는 단순한 화제성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의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려는 관점에 가깝다. 퍼스토리는 퍼 회사이지만 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기술과 전통, 윤리와 현실, 글로벌 시장과 로컬 제조를 동시에 품으려 한다.


김경찬 대표는 "퍼 산업이 살아남으려면 퍼만 잘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을 혁신하고, 고객과의 신뢰를 쌓고, 무엇보다 정직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정직하지 않으면 이 업은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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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보다 완성도, 속도보다 신뢰


퍼스토리의 작업 방식은 요즘 패션 업계의 흐름과는 사뭇 다르다. 빠르게 트렌드를 좇고, 대량 생산하고, SNS에서 화제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브랜드들과 달리, 퍼스토리는 느리지만 단단하다.


김경찬 대표는 "우리는 트렌드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대신 브랜드가 원하는 완성도를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디자이너가 그린 스케치를 현실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는다. 퍼의 결, 색감, 무게, 마감 하나하나가 모두 협의 대상이다.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파는 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오래 입을 수 있는 걸 만듭니다." 그의 말처럼, 퍼스토리가 납품하는 제품들은 한 시즌 입고 버리는 옷이 아니라, 몇 년을 두고 입는 옷들이다. 그 차이는 단순히 내구성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 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건 소재가 아니라 철학 없는 방식


김경찬 대표를 만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가 리얼 퍼의 미래를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다만 자기 자리를 지킬 뿐이다. 유행에 끌려가지 않고, 시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즘 패션 업계에서는 리얼 퍼의 미래에 대해 쉽게 단정 짓는다. 하지만 김경찬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라지는 건 소재가 아니라 철학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얼 퍼든 페이크 퍼든, 중요한 건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자세다. 왜 이 소재를 선택하는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무엇을 위해 만드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어떤 소재를 쓰든 결국 소비자에게 닿지 못한다. 반대로 그 답이 분명하다면, 리얼 퍼는 줄어들 수는 있어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K패션이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지금, 우리는 자주 화려한 성공 스토리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산업의 진짜 저력은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해온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김경찬 대표 같은 패션인들이 있기에 K패션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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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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