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월 열리는 ‘프레미에르 비죵’은 새 시즌의 풍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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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미에르 비죵(PV)이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매’가 아니라 ‘제안’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
패션의 출발선, 프레미에르 비죵(PV)
패션의 새해 시작은 1월 1일이 아니다. 패션의 시간은 달력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고, 그 출발점은 언제나 파리에서 먼저 포착된다. ‘프레미에르 비죵(PV)’의 문이 열리는 순간, 패션의 새로운 시즌이 시작된다.
프레미에르 비죵은 1973년 프랑스 리옹 지역의 실크 업체 전문가들이 모여 시작한 작은 원단 행사가 기원이다. 1980년 파리로 무대를 옮기면서 유럽 전역의 원단 업체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계 최대의 소재 전시회로 발전했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판매’가 아니라 ‘제안’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앞으로의 패션 분위기를 먼저 감지한다. 숫자나 계획서가 아니라 색의 온도와 소재의 밀도, 표면의 감각으로부터 다가올 새 시즌 트렌드를 예측한다.
PV는 패션의 트렌드를 정답처럼 제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방대한 트렌드 북과 컬러 차트, 다양한 소재 제안들은 지침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즉 PV는 단순히 원단을 사고파는 장소가 아닌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과 가치의 총체다. 매년 두 차례 열리는 이 전시회는 패션 산업 전체의 방향타 역할을 한다. 디자이너, 바이어, 소재 개발자들이 이곳에서 만나 대화하고, 그 대화 속에서 다음 시즌의 윤곽이 하나 둘 드러나게 된다.
소재와 컬러로 읽는 시대 감각
이번 PV는 2026-2027 가을겨울 시즌을 위해 ‘연결(Connection)’이라는 주제 아래 ‘New Dynasties(새로운 왕조)’, ‘Ego-Eco(에고와 에코)’, ‘Territories of Expression(표현의 영토)’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이는 권위의 재정의, 즉 개인의 정체성과 선택으로 스스로 구축하고 증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욕망이 환경과 어떻게 공존하는가의 균형, 그리고 자기 표현이 삶 전반으로 확장되는 시대의 가치 구조를 담고 있다.
곧 이어질 2027년 봄여름 시즌은 긴 불확실성의 터널을 지나며 회복을 모색하는 즐거움과 개방성의 키워드를 제시한다.
패션 산업이 소비 시점보다 대략 1년에서 1년 반을 앞서 소재를 결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메시지는 지금이 아니라 '다가올 시간'을 예측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성이야말로 패션 산업이 단순한 소비재 산업을 넘어 문화적 예측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컬러는 시대의 심리다. 우리가 옷을 보는 순간 0.1초 만에 느끼는 감정은 형태보다 색에서 먼저 느껴진다.
컬러는 브랜드가 한 시즌 동안 말하고자 하는 무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언어다. 불안한 시기에는 채도가 낮아지고, 회복의 기미가 보일 때는 밝은 색이 부각된다. 글로벌 트렌드 세미나를 듣다 보면 컬러가 단순한 미적 선택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반영임을 실감하게 된다.
경제 위기 이후에는 어스 톤이 주를 이루고, 사회적 안정기에는 파스텔과 비비드 컬러가 공존한다. 소재 역시 이 흐름과 함께 움직인다. 부드러움이 선택되는 시기, 구조감이 강조되는 시기, 기능성이 요구되는 시기. 이 모든 변화의 흐름은 PV에서 가장 먼저 포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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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원단에서 출발한다
디자이너의 손은 스케치북보다 먼저 원단 위를 향한다. 컬러 칩 위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색의 농도를 확인하고, 조직의 밀도와 촉감을 손끝으로 읽어낸다. 디자인은 형태 이전에 감각이며, 그 출발점은 먼저 소재다.
최근의 흐름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 옷의 소재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내 삶의 가치와 맞는지를 먼저 살핀다. 디자인의 출발점인 소재 선택의 기준이 감각에서 태도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한 마디로 과시보다는 지속, 속도보다는 축적, 완성보다는 과정이 중요해진 시대다. 컬러 하나, 조직 하나, 가공 방식 하나에는 사회적 긴장과 회복에 대한 욕망, 그리고 미래를 향한 조심스러운 희망이 스며 있다. 소재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제 단순히 옷의 재료를 고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브랜드의 철학과 소비자와의 약속을 구체화하는 과정이다.
전시장의 구조는 곧 패션산업의 구조
PV 전시장은 실(Yarns), 원단(Fabrics), 디자인(Designs), 부자재(Accessories), 가죽(Leather), 제조(Manufacturing) 등 여섯 개의 핵심 섹션으로 구성된다. 이는 단순한 공간 배치가 아니라 패션 산업이 작동하는 순서와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는 지도와 같다.
패션업계 종사자는 매년 두 차례씩 파리 전시회를 찾아 소재를 직접 만져보고 사람을 만나고 그 안에서 산업의 흐름을 읽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전시 공간은 트렌드를 확인하는 장이라기보다 산업의 리듬을 몸으로 느끼는 경험에 가깝다. 전시장에 가득한 원단 앞에서 서성거릴 뿐 부스 안에 들어가 상담조차 엄두내지 못하고 안절부절한다.
그 시기를 지나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건 패션 산업은 감각과 열정만으로 움직이는 세계가 아니라, 각자의 역할과 순서, 그리고 축적된 신뢰 위에서 차분하게 이어지는 구조를 가진 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이 구조 속에서 무엇이 먼저 움직이고 무엇이 뒤따라 변화하는지를 보게 된다.
패션이 파리에서 시작되는 이유
패션의 중심이 파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역사나 전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제안하며 산업 전체가 함께 사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프레미에르 비죵이 50년 넘게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소재와 컬러, 패턴, 디자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트렌드는 정답이 아니라 대화의 시작점이다. 디자이너는 이 제안을 받아 자신만의 해석을 더하고,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이 시장과 소비자에게 선보인다.
우리가 새해가 되면 지난 해를 돌아보고 버릴 것과 선택할 것을 고르는 것처럼 프레미에르 비죵은 매년 패션업계에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음 시즌엔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새롭게 만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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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숙 대표
lemers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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