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브랜드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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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의 K패션, 세계를 입히다 45

2026-01-18 오후 9: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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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패션학과 학생들 중 실제로 마흔까지 전공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약 20%. 나머지는 일을 그만두거나 전혀 다른 길로 간다.



패션학과 졸업 쇼의 백스테이지는 늘 비슷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손톱을 물어뜯는 학생, 핀을 입에 물고 마지막 바느질을 하는 손, 무대 위로 나가기 직전 거울 앞에서 숨을 고르는 모습들.


나는 이 풍경 속에서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10년 후, 이들 중 몇 명이나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 중 이 일을 이어가는 사람은 20%가 채 안 된다. 나머지 80%는? 일을 그만두거나 전혀 다른 영역으로 흩어진다.


재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졸업 무대에 선 이들은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췄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사라진다.


브랜드의 세계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신규 브랜드의 90% 이상이 10년 안에 문을 닫는다. 20년을 넘기는 브랜드는 극소수이고 30년 이상 지속되는 브랜드는 전설의 영역이다.


2001년, 나는 몬테 밀라노를 시작했다. 이제 25년째다. 이 시간은 내게 하나의 확신을 줬다. 브랜드는 제품이 아니라 생명체라는 것. 정확히는 사람처럼 늙고 사람처럼 버티고 사람처럼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브랜드에도 이력서가 있다. 그런데 그 이력서에 적히는 건 매출 숫자가 아니라 버텨낸 시간이다. 직장 생활 3년 차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에 온다. 첫 번째 위기가 닥치고, 두 번째 좌절이 찾아오고, 세 번째 한계가 나타난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경력을 쌓는다.


브랜드도 똑같다. 초반 몇 년은 열정과 아이디어만으로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시험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


위기는 위기는 예고 없이, 동시다발로, 반복해서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마주한 문제들은 단독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국내 패션 시장이 침체되는 동시에 백화점 중심 유통 구조가 무너졌다. 이탈리아 원단 가격이 예측 불가능하게 치솟는 와중에 원부자재 공급은 불안정해졌다. 환율이 급변동하고, 글로벌 팬데믹이 터지고, 전쟁으로 물류가 마비됐다.


문제는 이것들이 정중하게 순서를 지켜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시에 터진다.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 새로운 균열이 생긴다. 브랜드를 운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너지는 댐을 막는 일과 같다. 막는 동안에도 새로운 균열은 계속 생긴다.


자본이 많다고 살아남는 건 아니다


대기업 브랜드들을 보라. 론칭 때부터 수십억, 수백억의 자본이 투입된다. 유명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최고급 매장을 열고, 대대적인 마케팅 캠페인을 펼친다.


그런데 그 브랜드들 중 상당수가 5년, 10년 안에 조용히 사라진다. 왜일까?


나는 그 이유가 '체력'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체력이란 자본의 크기가 아니다. 정신적 지구력의 문제다. 한 번의 실패 후에도 다시 일어서는 힘, 두 번째 좌절 후에도 방향을 바로잡는 능력, 세 번째 위기에서도 시작의 이유를 기억해내는 정신.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투자 유치로 얻을 수 없다. 오직 시간 속에서, 반복된 실패와 회복을 통해서만 단련된다.


철학은 위기 속에서 나침반이 된다


몬테 밀라노는 처음부터 ‘옷을 많이 팔자’는 목표로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나이 드는 것을 존중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는 몸, 취향,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하고 싶었다. 50대의 몸은 30대와 다르고, 60대의 일상은 40대와 다르다. 이 차이를 결함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으로 보는 옷을 만들고 싶었다.


이 철학이 있었기에 위기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백화점 유통이 무너졌을 때 우리는 온라인으로 갔다. 나이 든 고객이 온라인에서도 편하게 쇼핑할 수 있는 경험을 설계했다. 상품 사진은 확대해도 디테일이 보이도록 촬영했고, 사이즈 가이드는 실제 착용 사진과 함께 제공했다.


원단 가격이 오를 때도 무조건 싼 원단으로 바꾸지 않았다. 대신 디자인을 단순화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줄여서 원가를 조정했다. 좋은 원단의 촉감은 나이 든 고객에게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존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있으면 모든 결정에는 기준이 생긴다. 철학이 없으면 위기 때마다 표류한다. 매출이 떨어지면 트렌드를 쫓고, 경쟁사를 따라하고, 할인을 남발한다. 그렇게 브랜드는 정체성을 잃고 시장에서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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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브랜드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브랜드가 강한 것이다.



반짝임과 꾸준함


패션학과를 졸업한 학생 중 80%가 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실패를 대하는 마음가짐의 차이다. 누군가는 첫 번째 좌절 앞에서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두 번째 실패 후 자신이 이 분야에 맞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누군가는 세 번째 거절을 받고 조용히 짐을 싼다.


하지만 살아남는 20%는 다르게 생각한다. 첫 번째 실패는 배움이고, 두 번째는 수정이고, 세 번째는 정교화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인다. 실패를 끝으로 보지 않고 과정으로 본다. 거절을 거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드백으로 해석한다.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브랜드와 사라진 브랜드를 가르는 건 초기 자본도, 디자인 역량도 아니다. 한 시즌 매출이 떨어졌을 때 브랜드를 접을 것인가,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할 것인가. 유통 채널이 막혔을 때 포기할 것인가, 새로운 채널을 개척할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이 모여 브랜드의 존폐가 결정된다.


시간은 가장 공정한 명제


오늘도 수백 개의 브랜드가 새로 생긴다. 인스타그램에는 신규 브랜드의 론칭 포스트가 넘친다. 화려한 룩북, 감각적인 카피, 젊은 에너지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역시 수백 개의 브랜드가 조용히 사라진다. 아무런 공지도 없이 계정은 업데이트를 멈추고, 쇼핑몰은 접속 불가 상태가 된다.


그 사이에서 살아남는 브랜드는 무엇일까? 가장 화려한 브랜드가 아니다. 가장 세련된 브랜드도 아니다. 가장 끝까지 남아 있는 브랜드다.


시간은 잔인하다. 시간은 겉치레를 벗겨낸다. 시간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은 가장 공정하다. 시간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하게 시험받는다.


화려한 론칭 이벤트는 3개월이면 잊힌다. 유명 모델을 기용한 광고는 6개월이면 기억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10년간 일관되게 유지한 품질은 고객의 신뢰로 쌓인다. 15년간 변하지 않은 철학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된다. 20년간 지속한 고객 서비스는 브랜드의 자산이 된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성공한 브랜드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시작할 때의 이유를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출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라는 걸 안다. 고객을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본다. 트렌드를 쫓기보다 자신만의 철학을 만든다.


이들은 빠르게 커지지 않는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란다. 한 시즌에 화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10년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유행을 선도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행이 지나간 후에도 살아남는다.


브랜드의 생존은 결국 사람의 생존과 같다. 재능으로 시작하지만 꾸준함으로 증명된다. 자본이 필요하지만 방향은 철학으로 잡는다. 그리고 시간 앞에서 검증받는다.


오늘도 누군가 새로운 브랜드를 시작하고, 어딘가에서 브랜드의 문을 닫는다. 시간은 흐르고 시장은 변하고 트렌드는 사라진다. 하지만 계속 남아 자리를 지키는 브랜드들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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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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