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상품이 아닌 ‘관계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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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의 K패션, 세계를 입히다 10

2025-05-16 오전 9: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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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들이 찾는 것은 옷이 아니라 ‘이해’



패션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그것은 취향이다. 또 다른 이에게는 권위, 혹은 자기표현이다. 그러나 내가 20년 넘게 여성들과 마주하며 확신하게 된 한 가지가 있다.


패션은 옷이 아니다. 패션은 ‘관계’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팔기 위해 만들어진 옷’이 아닌 ‘살아가는 몸’을 위한 옷을 만드는 현장으로 가야 한다.


고객은 자신을 이해 받고 싶어한다


2001년, 나는 몬테밀라노(Monte Milano)라는 시니어 여성 패션 브랜드를 만들었다. 내 안엔 한 가지 믿음이 있었다. “좋은 옷은 반드시 알아봐 줄 것이다.” 품질 좋은 소재, 쉽게 세탁되는 기능,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적인 가격에 담겠다는 사명.


그렇게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매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고객들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매장을 찾은 50~70대 여성 고객들은 옷의 기능이나 가격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피팅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고, 매장 직원에게 자신이 얼마나 예전과 달라졌는지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때로는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고객들이 몬테밀라노에서 찾는 것은 옷이 아니라 ‘이해’였다. 고객들은 변해가는 자신의 몸과 감정, 그리고 삶의 속도에 걸맞은 브랜드를 원했다. “이 나이에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제는 어깨가 좁아지고 허리는 굵어졌어요”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체형의 변화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이렇게 이해됐다. “나는 이제 예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예뻐지고 싶어요.”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줬으면 해요.” 몬테밀라노는 바로 이 간절한 욕망에 응답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었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브랜드


패션 산업은 흔히 브랜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명확한 콘셉트’, ‘일관된 이미지’, ‘고정된 타깃층’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브랜드는 단단할수록 깨지기 쉽다는 걸 깨달았다.


몬테밀라노는 처음엔 50대 여성을 주요 타깃으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객도, 우리도 함께 나이를 먹었다. 그들이 60대, 70대가 되면서 우리는 제품 라인을 바꾸고, 디자인을 더 여유롭게 조정하고, 매장 조명까지 바꿔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브랜드는 하나의 정체성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고객이 변하면 브랜드도 자연스럽게 변해야 한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우리는 고객을 기다리지 않았다. 함께 걸어갔다. 그 길 위에서 옷만 팔지 않았다. 새로운 감정, 새로운 자존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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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보다 깊은 혁신은 ‘관계’ 안에 있다


요즘 패션계는 기술 혁신의 전쟁터다. AI 스타일 추천, 데이터 기반 타깃 마케팅, 실시간 피드백 시스템 등 온갖 디지털 솔루션이 등장한다. 물론 이런 흐름은 중요하다. 나 역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몬테밀라노의 핵심 전략은 그것들과 거리가 멀다. 우리는 고객 데이터를 수집하는 대신 고객의 얼굴을 읽는다.


몬테밀라노의 매장 직원들은 옷을 권하는 대신 감정을 듣는다. “최근 건강은 어떠셨어요?”, “요즘 외출 자주 하세요?”, “손주 돌보시느라 바쁘시겠어요.” 이런 말들은 스몰토크가 아니다. 그것은 고객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의 의식’이다.


그 대화 안에서 우리는 고객의 체형뿐 아니라 마음을 본다. 그들이 어떤 날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어떤 감정에 머물고 있는지를 읽는다.


진정한 혁신은 여기서 시작된다. 고객의 삶에 ‘동행하는 기술’은 그 어떤 마케팅보다 깊다.


우리가 여는 런웨이는 ‘삶의 무대’


몬테밀라노 런웨이 무대 위엔 전문 모델이 아니라 50~80대의 실제 고객들이 오른다.


그들의 워킹은 완벽하지 않다. 약간 어깨가 굽었고 걸음은 느리다. 그러나 그 무대만큼 아름다운 장면은 드물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말한다. “나는 여전히 나답게 살고 있고, 내 나이도 나의 일부다.”


그 무대는 우리가 고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브랜드는 이런 ‘자존감의 장면’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의 시대, 브랜드는 세계관이 되어야 한다


예전엔 브랜드가 권위를 가졌고 고객은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브랜드가 보여주는 트렌드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고객은 브랜드와 동등한 위치에서 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에 참여한다. 어떤 브랜드를 사느냐는 ‘어떤 세계관에 속하느냐’를 의미한다.


요즘 고객은 더 이상 “이 브랜드 좋더라”가 아니라 “이 브랜드는 나를 알아줘”라고 말한다. 브랜드는 상품의 집합이 아닌 신념과 문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더는 “이 제품 마음에 들어요”가 아니라 “이 브랜드와 함께 살아가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있다.


옷은 닳아도 관계는 깊게


패션은 본질적으로 소모되는 산업이다. 매 시즌 바뀌고, 입다 보면 닳는다. 그런데도 수십 년간 같은 브랜드를 고집하는 고객이 있다. 왜일까? 그건 그 브랜드와의 관계가 ‘가치 있는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몬테밀라노가 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생의 한 장면을 함께 구성하는 브랜드이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의 고객이 90세가 되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예쁘게 표현할 수 있는 옷을 함께 고르고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패션은 유행이 아니다. 패션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다. 그리고 그 제안에 진심을 담을 때, 브랜드는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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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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