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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글라데시 치타공에 위치한 영원무역 공장 |
이달 초 필자가 ‘방글라데시 인베스트먼트 서밋’에 참가해 그곳의 거대한 공장 단지를 걷는 동안, 내내 머리 속에는 서울 '동대문'으로 가득했다. 길게 늘어선 셔틀버스에서 내리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 정확하게 움직이는 자동 재단기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제하는 스마트 시스템. 이 모든 방글라데시 광경이 내게 던진 질문은 하나였다. “한국의 패션 산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글로벌 무대에서 빛나는 한국 기업들
영원무역의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일하는 7만 5천 명의 직원들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노스페이스'와 '룰루레몬'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신뢰하는 품질과 기술의 집합체다. 나는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의류들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거듭나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영원무역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기술력, 품질 관리 시스템, 그리고 글로벌 트렌드를 읽는 안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세아상역은 더욱 다양한 포트폴리오로 인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자라’, ‘망고’ 같은 패스트패션 거인들부터 미국의 스포츠웨어 제조사 ‘테그라’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세아상역의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는 이미 아시아를 넘어 중남미, 아프리카까지 뻗어있다. 이들의 전략은 단순히 생산 비용을 낮추는 것을 넘어, 각 지역의 특성과 장점을 살린 최적의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한세실업은 또 다른 차원의 혁신을 보여주고 있다. GAP, 타겟, H&M과 손잡고, 베트남, 미얀마, 아이티, 과테말라 등 6개국에 생산 거점을 구축했다. 이러한 다국적 생산 기지는 단순한 지리적 분산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와 시장 접근성을 높이는 전략적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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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세실업은 스마트팩토리 시스템인 ‘햄스’를 자체 개발했다. 사진은 한세실업 베트남 공장 직원이 햄스를 활용해 의류 공정 작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사진: 한세실업) |
혁신을 통한 미래 준비
이 한국 기업들은 이미 의류 생산을 넘어 미래로 도약했다. 한세실업의 'HAMS(햄스, 한세 어패럴 매니지먼트 시스템)는 전 공정을 자동화하여 불량률을 0.01%까지 낮췄다. 이는 인간의 손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품질 관리다. 대량 생산과 완벽한 품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한솔섬유는 3D 가상 샘플링 기술로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었다. 실제 원단을 자르고 재봉하는 과정 없이도, 컴퓨터 화면에서 완벽한 샘플을 구현해 바이어와 소통한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시간과 자원을 획기적으로 절약하는 혁신이다.
이들 기업의 혁신은 생산 공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친환경 소재 개발, 에너지 효율화, 탄소 배출 저감 등 ESG 경영의 모범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동화, AI, 친환경 소재, ESG 경영까지 이들은 더 이상 '옷을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회사'로 진화하고 있다. 원단 개발부터 디자인, 생산, 물류까지 전 과정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도입하고,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제 이들에게 의류 생산은 제조가 아닌, 고도의 기술과 시스템이 결합된 프로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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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섬유 공장 전경 |
동대문, 변화의 시간
그렇다면 한때 전 세계가 주목했던 동대문은 어떤가? 하룻밤 사이 샘플을 완성하는 '초스피드' 생산 시스템, 디자이너와 봉제장인, 원부자재 업체가 촘촘히 연결된 생태계. 이 모든 것이 동대문의 자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 베트남, 방글라데시, 인도의 대형 OEM 기업들이 자동화와 규모의 경제를 무기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동대문은 여전히 활기찬 패션 시장이지만,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젊은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꿈을 키우지만, 그들의 창의성이 세계 시장으로 확장되기 위한 인프라와 시스템은 부족하다. 소규모 공방들은 자동화된 대형 공장과 경쟁하기 어렵고, 원부자재 시장은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대문은 이제 갈림길에 서 있다. 변화할 것인가, 사라질 것인가. 나는 지난 15년간 글로벌 패션 시장을 누비며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동대문이 나아가야 할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스마트 팩토리로의 전환이다. AI 기반 봉제 시스템, 자동 재단기, 디지털 샘플 제작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 전환을 지원해야 한다.
둘째, 친환경 소재와 ESG 경영이다. 새로운 소비자들은 제품뿐만 아니라 그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동대문의 원단 시장도 이 흐름에 합류해야 한다.
셋째, 통합적 기획력이다. 봉제 기술만으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기획, 마케팅, 유통, 브랜딩까지 아우르는 종합적 역량이 필요하다.
넷째, 글로벌 네트워크의 복원이다. 한때 동대문은 전 세계 바이어들의 성지였다. 그 명성을 되찾으려면 동대문만의 독특한 가치를 재정립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한 걸음
인도에서 베트남, 미얀마, 중국, 방글라데시, 필리핀까지 전 세계 공장을 방문하면서 나는 그들의 미래지향적 움직임을 목격했다.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첨단 기술과 시스템을 갖춘 '패션 테크'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여전히 세계적인 디자인 감각과 창의성, 그리고 장인정신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시스템과 기술만 더해진다면, 동대문도 세계시장에서 다시 빛날 수 있다.
나는 믿는다. 동대문이 단순히 '싸고 빠른' 패션시장이 아니라, 스마트하고 지속가능한 글로벌 마이크로 클러스터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변화는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것은 현재에 안주하는 무관심이다.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이제는 한 발짝 내딛어야 한다. 동대문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시선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된다. 방글라데시에서 베트남까지, 글로벌 패션 생산의 현장을 직접 보고, 배우고, 그 경험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동대문은 여전히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의 의지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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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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