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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리 근교 Nola business park |
나폴리에서 다시 떠올린 초심
나폴리 정부의 공식 초청으로 이탈리아의 산업 시찰을 다녀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곳은 이탈리아 남부 최대의 패션 도매 수출 유통 단지, CIS di Nola였다.
이곳은 Interporto di Nola 지역, 정확히는 Lotto D1 구역에 위치해 ‘시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공간이었다. 철저한 계획 아래 운영되는 이곳은 단순한 도매 시장을 넘어선 산업 허브였다. 수천 개의 기업이 모여 유통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매장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전문성을 갖춘 브랜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매 바이어와 판매자들이 끊임없이 거래를 주고받으며 이탈리아 남부 경제의 맥을 짚고 있었다.
CIS di Nola가 그저 그런 판매 공간이 아니라는 점은 운영 시스템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물류, 보관, 라벨링, 유통 관리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인프라가 구축된 CIS di Nola는 자타공인 하나의 거대한 도매 산업 단지였다. 전통적인 재래시장과는 확연히 다른, 현대적인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유통의 심장부인 것이다.
2001년, 첫 바잉의 기억
이번 방문은 패션 산업 시찰이라는 공적인 의미 외에 개인적으로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2001년, 내가 몬테 밀라노(Monte Milano)라는 편집숍을 기획하고 시작했을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과 20여 년 전임에도 당시 한국에서는 ‘편집숍’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다. 유통 시장에서는 ‘하나의 간판에는 하나의 브랜드만 입점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고, 여러 브랜드를 큐레이션하는 편집숍은 브랜드로 인정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각기 다른 브랜드를 바잉하면서도 ‘Monte Milano’라는 단일 라벨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하나의 브랜드처럼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몬테 밀라노라는 브랜드를 만들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것이 결국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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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CIS di Nola는 이탈리아 남부 최대의 패션의 도매 수출 유통 단지이다. |
밀라노의 CTM과 나폴리의 CIS di Nola
내가 처음으로 바잉을 시작한 곳은 밀라노 근교의 첸트로 테실레 밀라노(Centro Tessile Milano, CTM)라 불리는 북유럽 최대의 도매 수출 단지였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약 한 시간 거리에 있는 Cernusco sul Naviglio, 줄여서 ‘첼누스코’라고 불리는 이곳은 단순한 시장이 아니었다. 수출입 대행, 창고 보관, 리패킹, 라벨링, 컨설팅까지 패션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이었다.
CTM에서 나는 브랜드와의 관계를 맺고, 제품을 선별하고, 처음으로 통관 서류에 서명하는 등 사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때 온몸으로 느낀 전율은 이곳에 좋은 상품이 많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 그리고 도매라는 생태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는지를 깨닫게 되면서 큰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던 것이다.
나폴리의 CIS di Nola는 밀라노의 CTM과 여러 면에서 비교되었다. 두 곳 모두 엄청난 규모와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지만, 속성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CTM이 ‘브랜드 중심, 고급 바잉 허브’의 느낌이라면, CIS di Nola는 ‘대중성, 실용성, 대량 유통’에 초점을 맞춘 구조였다. 밀라노에서는 정제된 아이템을 소량 큐레이션하는 느낌이 강했다면, 나폴리에서는 대량 바잉과 가격 경쟁력을 중시하는 좀 더 실전적인 시장이었다.
물론 명료한 공통점도 있다. 두 곳 모두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경제 시스템이자 산업 생태계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CTM이 북부 이탈리아 특유의 산업적 정밀함과 품질 중심의 유통을 보여줬다면, CIS di Nola는 남부 이탈리아 특유의 유연함과 속도, 그리고 인간적인 거래 문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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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천 개의 기업들이 모여 유통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는 이탈리아 특유의 디자인 감각과 실용성으로 가득했다. |
이탈리아 패션산업을 바라보며 부러웠던 것은, 그들의 경쟁 상대가 타국이 아닌 ‘자국 내 경쟁’이라는 점이었다. 이탈리아 브랜드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독창성을 유지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한국 패션산업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국도 패션과 섬유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움직이고 있다. 오랜 기간 이 산업에 몸담으며, 한국 역시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품은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사업가의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초심과 변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
이번 나폴리 방문은 과거와 현재의 나, 그리고 브랜드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앞으로의 브랜드 방향성에 대해 다시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 그것이 2001년의 나와 2025년의 내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나와 몬테 밀라노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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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서희(Sylvia Oh)는 미국 오클라호마시티대학교와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프랑스 브랜드 레오나드(LEONARD PARIS) 바잉팀장을 거쳐 2001년 몬테밀라노를 창업했다. |
오서희 대표
montemilan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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