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몬타나, 숙환으로 별세
가+
가-
1980년대 파워 드레싱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패션 디자이너

2024-02-26 오전 5:52:13

Image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한 디자이너 클로드 몬타나



80년대 여성의 신체를 왜곡해 극적인 페시티즘을 선보인 프랑스 출신 패션 디자이너 클로드 몬타나(Claude Montana)가 지난 23일(현지시각) 금요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영원한 시그니처 이지 라이더 룩(재킷, 가죽 바지, 카우보이 부츠)으로 잘 알려진 디자이너 클로드 몬타나는 생전 자신의 말처럼 "매우 높은 곳과 매우 낮은 곳"으로 구성된 극과극의 패션 커리어를 쌓았다.


70년대에 이름을 알리고 80년대의 사랑을 받은 그는 1990년 당시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랑방의 문을 두드리며 명성을 떨쳤다. 그는 패션계 최고의 영예인 황금 골무상을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연이어 두 번 수상했다.


이후 그는 재정적, 개인적 어려움에 부딪히며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광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1947년 6월 29일 파리에서 태어난 클로드 몬타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 개신교 신자였고 아버지는 카탈루냐인이었다. 리세 콩도르셋(Lycee Condorcet)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그는 형의 공부하는 길을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파리 오페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스윙잉 런던'에 매료되어 17세에 영국으로 떠났다.


그의 부모는 그의 선택과 생활 방식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단절시켰다. 하지만 아들의 성공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문 프로젝트에서 지원하고 수년 동안 그의 조수 역할을 한 여동생 재클린과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런던에서 곱슬 콧수염을 기른 이 젊은 금발 남자는 런던에서 종이 반죽으로 주얼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그의 작품 중 하나가 <보그>의 표지에 실렸다. 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취업 허가증도 없었다.


결국 파리로 돌아온 그는 가죽 전문업체 맥 더글라스(Mac Douglas)에서 패턴 제작자로 일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내 직업은 패션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첫 패션쇼는 1975년에 열렸다. 그의 화려한 색상과 화려한 럭비 숄더 의상은 즉각적인 인기를 끌었다.


1979년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 '하우스 오브 몬타나'를 설립한 클로드 몬타나는 패셔너블한 나이트클럽인 팔레스(Palace)의 단골손님이었던 그는 파리의 스타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되었다.


Image



패션 평론가 알렉산더 퓨리(Alexander Fury)는 "클로드 몬타나의 시그니처 실루엣은 1980년대 당시를 살던 우리의 시그니처 실루엣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타이트한 허리와 엄청나게 넓은 어깨에 짧은 치마나 딱 맞는 바지를 매치해, 상체의 힘을 강조하곤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여성들은 그의 디자인에서 자신의 강력한 비전을 확인한 나머지, 그의 쇼를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 당시, 패션 디자이너들은 두터운 팬층과 인지도로 순식간에 유명 인사로 거듭났다. 브랜드는 한 편의 콘서트와도 같은 쇼를 선보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꿈속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다. 당시 그의 연극 패션쇼는 하나의 이벤트였다. 크리스찬 라크루아가 말했듯이 분명"위대한 쇼"였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해 오뜨 꾸뛰르와 기성복을 모두 맡기겠다는 디올의 파격적인 제안을 거절한 그는 컬렉션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랑방에 크리에이티비 디렉터로 합류했다. 그리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몇 개의 시즌에서 비평가들의 칭찬을 받았지만,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이어진 10년이라는 기간에 걸쳐서도 그의 재산과 명성은 꾸준히 하향세를 그렸다


장 폴 고티에와 티에리 뮈글러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향수를 출시했지만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랑방과의 협업은 1997 년에 끝났고, 1997년까지 이어진 좋지 않은 사업 결과와 디퓨전 라인의 어려움으로 인해 몬타나는 파산을 선언했으며, 이후 프랑스의 사업가 장 자크 라야니(Jean-Jacques Layani)가 그의 브랜드를 인수했다.


2019년 바이로네스크(Byronesque), 파페치(Farfetch)와 협업한 소규모의 캡슐 컬렉션을 제외하고는 브랜드는 여전히 휴면 상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Image



한편 클로드 몬타나는 사생활로 수없는 논란을 겪기도 했다. 동성애자로 익히 알려졌던 그는 1993년, 그의 오랜 뮤즈였던 월리스 프랭큰(Wallis Franken)과 결혼했다. 하지만 3년 후 그는 창문에서 떨어져 사망했고, 당국은 이를 자살로 결론지었다. 패션지 <배너티 페어>는 후속 보도로 그들의 어두운 관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했다.


건강 문제가 있었던 그는 2008년에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전직 고고 댄서에게 집에서 폭행을 당했다. 그 충격은 그에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또한 그는 공격자가 자신에게 B형 간염을 옮겼다고 고소하는 지저분한 재판에 직면해야 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만을 사랑했던 그는 가끔씩 패션계로 돌아왔지만 최전선에 서지는 못했다.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마릴린 먼로가 될 바에는 차라리 그레타 가르보가 되겠다며, 상징적인 아이콘이 될 바에는 미스터리로 남는 것을 택하겠다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다.


클로드 몬타나의 능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디자인 컨설턴트이자 수집가인 스티븐 필립(Steven Philip)은 그를 ‘패션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단순히 하나의 시대정신을 상징했을 뿐만 아니라, 한 시대정신을 적극적으로 창조해내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논쟁의 여지가 없는 패션계의 왕으로서 군림했다는 사실은 그의 사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재부 패션 에디터
UB@fi.co.kr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메이비원(주) | 대표:황상윤 | 개인정보보호책임자:신경식
사업자등록번호:206-81-18067  | 통신판매업신고:제2016-서울강서-0922호
TEL 02)3446-7188  |  Email : info@fi.co.kr
주소 : 서울특별시 강서구 마곡중앙8로 1길 6 (마곡동 790-8) 메이비원빌딩
Copyright 2001 FashionInsight co,.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