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가 타카하시, 살아남은 옷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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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우의 Style 인사이트 05

2024-01-16 오전 9:27:07

개인의 삶과 역사를 담아 마음을 건드리는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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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 (Garments)’


언제 처음 ‘옷’에 관심이 생겼는지 떠올려 보면, 지금 엇비슷한 패션 분야에 발을 담은 이들과는 시점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압구정동에서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시절, 주변에는 그야말로 온갖 패션의 흐름이 오고 갔다. 스무 살 무렵부터 ‘에디터’가 꿈이긴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그러니까 슬슬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한 때에는 패션이 아닌 게임 잡지의 기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 3학년 첫 번째 중간고사 기간에 어린이날이 끼어 있었다. 당시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자주 들르던 PC방에 갔다가, 로데오 거리와 갤러리아 백화점 근처를 습관처럼 산책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리바이스의 청바지와 폴로 랄프로렌의 셔츠와 울 조끼 같은 것에 나이키, 아디다스의 스니커즈 혹은 닥터 마틴을 신고 있었다. 그때의 현실은 (사실, 별거 아니었지만) 훗날 영화 <매트릭스(Matrix)>를 보며 비슷한 기시감을 느꼈을 정도다. 더 큰 하나의 유행이 더 큰 소수의 통로를 거쳐 모두를 휩쓸던 시절이었다. 처음, 모두가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때는 ‘다른’ 옷을 구하기 위해 정보가 제한된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학교에는 소위 트렌드를 이끄는 친구들이 있었으나, 멀티숍에서 팔던 한국 매장에 들어오지 않은 나이키 스니커즈나 미국 힙합 문화를 예찬하는 어반 캐주얼웨어 같은 데는 관심이 없었다. 봄이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될 무렵 몰두하게 된 것은 헌 옷들이었다. 조금 좋게 표현하면 빈티지 옷들 말이다.


기무라 타쿠야가 멋지게 몸을 회전하던 구제 리바이스 엔지니어드 진을 사고, 주머니에 하얀 아크릴 물감을 덧칠하고, 아버지의 오래된 옷장에서 과거 석탄공사 재직 시절의 광산 실습용 작업복을 찾아냈다. 학교와 집만 오가던 시절, 동네 주변만 서성이던 고등학생은 (극소수였던) 몇몇 뜻이 맞은 친구들과 함께 혹은 홀로 동대문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수능 전날, 일찍 마친 수업을 뒤로 하고 간 곳은 시험을 치르게 될 학교가 아니라 (이제는 사라진) 구제 옷가지를 팔던 동대문쇼핑몰의 5층이었다. 스물한 살 먹은 털털한 매장 직원 누나(지금 잘 살고 있을까?)는 “석우야, 시험은 반이 운이야”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이후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동대문쇼핑몰 어딘가에서 산 몸에 꼭 맞는 얇은 패딩 재킷을 입고, 머리는 산발에 가까운 펌을 하고, 또 패션 브랜드에서 나온 워크웨어가 아닌 아버지가 실제로 젊은 시절 입은 갈색 작업복 바지에 프랑스에서 생산한 빈티지 아디다스 스니커즈를 신고 참석했다. 보수적인 강남 친구들은 헌 옷에 눈 뜬 나를 별종 취급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즐거웠고 새로운 무언가였다.



◇ ‘교토 (Kyoto)’


지난 11월 중순, 서울에 겨울답지 않은 비가 내린 날이자 2023년 수능시험날이었던 날에 나는 청명한 교토(Kyoto) 시내에 있었다. 처음 와본 도시는 서울보다 훨씬 인구가 적고, 관동 지역 중심지이자 일본의 수도인 도쿄(Tokyo)와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교토에 기반을 둔 타이가 타카하시(Taiga Takahashi)가 만든 브랜드 ‘T.T’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파브리카(FABRICA)의 서종근 디렉터가 방문 의향을 물었을 때, 사실 그때 브랜드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리하여 보내준 자료와 더불어 과거 인터뷰를 찾다가, 브랜드의 오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타이가 타카하시가 2022년에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보게 됐다. 젊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설립자가 불귀의 객이 되었음에도 브랜드는 문을 닫지 않고 오히려 그의 철학을 이어가는 길을 택했다. 보통은 이어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하는 궁금증이 동시에 일었다.


며칠간 비와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거짓말처럼 갠 토요일 아침, 하루 동안의 공식 일정이 시작하는 날에 비로소 이 브랜드, 즉 T.T에 깊숙이 관계된 이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여유로운 점심을 먹으며 만난 T.T의 사람들-디자이너부터 쇼룸의 디렉터와 세일즈 매니저들까지-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왜 우리를 서울에서 교토로 직접 초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온(Gion, 祇園)거리의 좁은 주택가 골목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타이가 타카하시의 매장, ‘T.T(그저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보이겠지만, 매장은 아주 절도 있고 우아하며, 한 예술가이자 패션 디자이너의 집념과 섬세함으로 가득 차 있다)’에서 보낸 몇 시간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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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 (SABI)’


교토 전통 가옥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선 매장에는 석재를 매끄럽게 갈고 다듬은 작품이 있고, 투박하고 단출한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두 개의 다도실이 있는 ‘티 룸 사비(Tea room SABI)’가 나타난다. 일본 전통 다도에서 영감받은 디저트를 만드는 주방이 슬며시 내비치는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은 바깥의 햇볕이 남 일인 것처럼 조용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젊은 여성 다도 장인은 예를 갖추고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매달 바뀐다는 차 메뉴와 따뜻한 손수건을 내어준다. 처음에는 왜 다도 체험에 한 시간 반이 걸리나 싶었으나, 다도 장인의 고유한 리듬감을 눈으로 따르며, 따뜻한 전통차부터 현대적으로 변주한 칵테일 형식의 차를 즐기는 사이 다양한 구성을 체험하고 나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추측하건대 T.T 매장 2층의 ‘티 룸 사비’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을 뜻하는 ‘와비 사비(わび?さび, 侘·寂)에서 따왔을 것이다.


나무, 돌, 금속과 유리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붓으로 칠한 듯한 벽지 사이에 있는 시간은 영원 같기도 했고 또 순간처럼 짧기도 하였다. 그리고 옷이 있었다.


◇ ‘타이가 타카하시(Taiga Takahashi)’


‘Taiga Takahashi’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맨 위에 공식 웹사이트가 뜬다. 접속 링크의 눈에 띄는 부분은 브랜드 이름 옆, ‘인벤토리(Inventory)’라는 단어로 보통 특정한 물품의 목록을 뜻하는 단어다.


웹 디자인은 간소함의 극한을 달리고 있으나,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 웹사이트 구성과 달리 모든 옷에 제품 번호(Lot number)가 달려 있다. 경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익숙한 표기인데, 가령 상아색의 두터운 캔버스 천으로 지은 ‘뉴스보이 백(Newsboy Bag)’에는 LOT. 004번이, 셰틀랜드 혼방 울로 만든 발마칸 코트에는 LOT. 408번이 지정되었다. 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만들어 선보이는 패션 브랜드이면서도, 설립자였던 故타이가 타카하시의 철학을 고스란히 반영한 옷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가 타카하시는 10대 시절, 예술과 패션에 몰두하며 1,000여 벌 이상의 시대별 빈티지 의복과 장신구를 수집했다고 한다.


브랜드로서 T.T, 그러니까 ‘Taiga Takahashi’는 이러한 과거 의복의 참조(reference)를 웹사이트 안의 아카이브(archive) 메뉴와 친절한 매장 직원들의 설명으로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1950년대에 생산한 바시티 재킷(varsity jacket)과 1940년대의 스웨트셔츠, 1910년대의 초어 재킷 (chore jacket)과 1930년대의 코듀로이 소재 스포츠 재킷처럼, 그들은 새로운 컬렉션의 원천이 된 옷의 개체 번호와 이름, 범주와 제작 국가, 생산 시기를 가지런히 정리하여 공개한다. 브랜드가 영감을 얻은 패션은 사실 당대 사람들이 패션으로 부른 무언가는 아니다. 미학적 관점을 추구한 호화로운 상류층의 고급 기성복이 아니라, 기능과 쓰임에 몰두한 작업복을 비롯한 시대의 짙은 흔적이기 때문이다.


소위 ‘레플리카(replica)’ 스타일의 옷을 선보이는 다양한 패션 브랜드가 당대의 옷을 복각하는 데 가장 큰 힘을 쏟고, 일부는 이를 참조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포장한다. 타이가 타카하시 또한 이러한 영역의 교집합에 있으나, 선명하게 다른 점은-그 정보를 모두 공개한다는 점 외에도-과거의 옷을 탐구하는 이야기의 방식 그 자체에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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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 개인의 삶과 역사(Their personal lives and histories)’


2023년 가을과 겨울에 선보인 브랜드의 제5장은 원칙적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인 2021년 가을/겨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10대 시절, 아직 디자이너도 예술가도 아니었던 어린 소년은 옷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모은 과거의 옷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던졌다.


세계 대전 시기의 어느 작업복은 소매와 몸통을 잇는 패턴 구조를 일반적인 유선형이 아닌 직각에 가까운 형태로 재단하였다. 극도로 물자가 부족한 시절에 한 벌이라도 더 많은 옷을 만들어야 하는 고육지책이었다. 선형의 조각을 모은 서양의 옷은 뜻밖에도 어린 시절부터 흔하게 본 기모노의 방법론과 이어졌다. 생전, 타이가 타카하시는 <WWD Japan>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옷의 총합을 ‘살아남은 옷’이라고 했다.


시대를 넘어서 기어코 현대까지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의 선택을 받은 옷에 질문을 던진다. 그 시대의 기능과 실리가 모여 사회적인 기능을 이루기도 했다. 옷들 자체에서 받은 영감은 물론, 실제 그 시절의 부자재를 사용하여 2020년대에도 능히 어울리는 옷과 컬렉션을 이룬다. 특정한 시대 혹은 그 시대의 집단이 이룬 옷들이 지금도 유효한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이는 가장 진일보한 화학 섬유와 첨단 소재, 첨단 가공으로 매끄럽게 여닫히는 기능성 부자재를 결합한 동시대 다른 옷들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시대를 넘어 살아남은 옷은 시대를 넘나드는 옷이 된다. 우리는 이 옷을 입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역사가 당신과 우리의 역사, 혹은 삶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충분히 가능하게 된다.


전통과 현재를 결합한 다도 체험부터 과거와 지금을 이은 옷들에 둘러싸인 몇 시간 동안, 조금 들뜬 감정으로 T.T의 매장과 각각의 옷에 관하여 관계자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경험은 선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요즘 흔히 하는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직접 초대한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 ‘마음을 치는 옷(Clothes that touch the mind)’


물론 서울을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는 비슷한 방식으로 옷을 만드는 브랜드가 있다. 식음료와 패션의 경험을 유려하게 연결하거나 더 넓고 커다란 규모의 경제를 설파하는 공간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여정의 마지막, ‘와비 사비’가 살아 있는 교토의 가장 오래된 절이자 생전 디자이너가 작품을 전시한 법당이 그대로 존재하는 ‘켄닌지(Temple Kenninji, 建仁寺)’에서 해가 지는 시간을 보내면서, ‘좋은 옷’과 ‘좋아하는 옷’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았다.


10대 시절, 남들과 달라지고 싶다는 계기로 패션보다 옷에 눈을 뜬 소년이 있었다. 이후 편집매장의 바이어와 강사 등 여러 직업을 거쳐 패션에 관한 글을 쓰거나 프로젝트를 도모하고 콘텐츠를 만들면서 브랜딩에 관여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후 여러 개인의 취향, 현실, 이상이 충돌하며 모난 부분은 깎이고 또 새로운 발견을 할 때도 있었다.


패션은 여전히 내가 사는 지역을 감싼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많은 이를 유혹한다. 옷은 서서히 가장 첫 번째 관심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훌륭한 패션 하우스와 블록버스터 영화를 뺨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뉴스와 온갖 상대적인 팔로워 숫자와 영향력을 지닌 인스타그램 속 유명인들과 기하학적이긴 하나, 한 발짝 들어가 실체를 들여다보면 알맹이는 부실한 실험, 그 모든 룩(look)의 향연이 동시대 패션(contemporary fashion)의 깃발 아래 펄럭인다. 사실, 그래서 나는 조금 지쳤고 패션이라는 단어 대신 스타일(style)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갔으며, 자원을 낭비하는 데 몰두하지 않는 패션의 방법을 고민하다 ‘지속 가능한 원부자재의 순환’을 모토로 건 텍스고라운드(TEXGOROUND®)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교토의 어느 골목에서, 치장과 뽐내기 위한 형태가 아니라 ‘개인의 탐구로부터 시작한 옷’의 이야기를 되뇌었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어느 때인가 브랜드 관계자에게 이 옷들이 마음을 건드린다고 말했다. 멋지고 화려한 컬렉션과 갈수록 늘어나는 물량 공세 속에 마음을 때리는 옷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은 흥미로운 역설이거나, 시대의 당연한 흐름이 되었다. 한쪽이 맞고 다른 쪽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다른 의미로 옷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든 옷을 본 것뿐이다.


‘왜’라고 질문하고, ‘어떻게’를 탐구하는 옷의 경험이 타이가 타카하시의 이름 안에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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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우
yourboyhood@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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