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패션의 대모 비비안 웨스트우드 |
'영국 패션계의 대모' 디자이너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29일(현지시간) 8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영국 패션계의 도발적인 디자이너로 통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락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무대 의상을 만든 사람으로 1970년대 펑크 룩의 대명사였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비비안 웨스트우드 패션하우스는 이날 트위터에 "고인이 런던 남부 클래펌 자택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잠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세상은 더 나은 변화를 만들기 위해 비비안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추모했다.
기후변화, 환경오염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미국의 기밀을 폭로한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에 대한 그녀의 지지는 모두 그녀의 모델들이 런웨이에서 들고 다니는 항의 티셔츠나 현수막를 통해 패션 정치학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1989년 잡지 표지를 위해 당시 총리였던 마가렛 대처로 분장했고, 2015년에는 수압파쇄법이 "수질오염과 건강 문제, 기후변화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UN이라고 적힌 흰색 탱크를 몰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자택으로 돌진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패션 쇼 피날레 장면 |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199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 부터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충격을 주고 싶어 했던 그녀는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버킹엄 궁전에 나타났는데, 이 사실은 그녀가 스커트를 회전시켜 드러냄으로써 사진 기자들에게 증명되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2014년 자서전에서 "내가 패션에 종사하는 유일한 이유는 '적합성'이라는 단어를 없애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 요소가 없다면 어떤 것도 내게는 흥미롭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오렌지색이나 흰색 머리로 즉시 알아볼 수 있는 비바안 웨스트우드는 1970년대 런던에서 펑크 패션으로 처음 유명세를 탔고,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무대 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펑크 룩'이라는 장르를 창조했다. 섹스 피스톨스의 매니저 말콤 맥라렌과 함께, 그녀는 록앤롤에서 영감을 받은 옷을 팔기 위해 당시의 히피 트렌드를 무시했다.
말콤 맥라렌과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체인으로 장식된 찢어진 의상과 라텍스, 페티시 작품들을 '렛잇락' '섹스' '난동꾼' 등과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런던 킹스로드에서 판매하며 펑크 룩의 시대를 열었다.
두 사람은 스와스티카 프린트와 벌거벗은 가슴 그리고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입술에 안전핀을 문 여왕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지퍼, 안전핀, 표백된 닭 뼈로 금속 장신을 단 민소매 블랙 티셔츠였다.
펑크 패션을 창조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생전에 자서전에서 "나와 말콤 이전에는 펑크라는 장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그리고 펑크에 대해 알아야 할 또 다른 점은, 그것은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1941년 4월 8일 영국 중부 도시 글로솝 마을에서 태어난 비비안 이자벨 스와이어(Vivienne Isabel Swire)로 태어난 비바안 웨스트우드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후의 배급받던 시기에 성장했다.
재활용 심리가 그녀의 작업에 스며들었고, 그녀는 패셔니스타들에게 "잘 선택하고 덜 사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그녀는 약 30년 동안 런던 남부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그녀가 10대였을 때, 청과물 상인과 면직 공이었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교사로 재교육을 받기 전에 보석 제작과 은세공학을 공부했던 런던 북부로 이사했다.
그녀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안, 첫 번째 남편인 데릭 웨스트우드를 만나 그녀가 집에서 직접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했다. 그들의 아들 벤은 1963년에 태어났고 부부는 1966년에 이혼했다.
미혼모가 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런던 포르토벨로 로드에서 보석류를 팔다가 낭만적이고 전문적인 파트너가 될 미술학도 말콤 맥라렌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란제리 브랜드 '에이전트 프로보카투르' 공동 창업자인 조 코레라는 아들을 두고 있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전핀을 문 여왕의 이미지를 이용한 티셔츠를 입은 비비안 웨스트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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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밴드 섹스 피스톨스와 결별한 후, 두 사람은 1981년 첫 번째 캣워크 쇼를 열어 아프리카 스타일의 패턴, 해적 스타일의 트라우저와 바지 띠로 이루어진 '뉴 로맨틱' 룩을 선보였다. 당시 40대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서서히 패션계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결국 1980년대 초에 말콤 맥라렌과 헤어졌다.
종종 역사를 되돌아보는 그녀의 영향력 있는 디자인에는 코르셋, 해리스 트위드 정장, 타페타 볼가운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의 1985년 작품 '미니 크리니(Mini-Crini)' 라인은 그녀의 짧은 부풀린 스커트와 잘 어울리는 실루엣을 선보였다. 1993년 모델 나오미 캠벨이 캣워크에서 넘어져서 화제가 되었던 그녀의 스카이-하이 플랫폼 슈즈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내 옷에는 사연이 있다. 그들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성격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클래식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웨스트우드 브랜드는 1990년대에 패셔니스타들이 파리에서 열린 런웨이쇼에 몰려들면서 주목을 받았고, 전세계에 그녀의 라인, 액세서리, 향수를 판매하는 매장들을 오픈하면서 번창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두 번째 남편이자 파트너인 안드레아스 크론탈러 |
그녀는 비엔나에서 패션을 가르치는 두 번째 남편 안드레아스 크론탈러를 만났다. 그들은 1993년에 결혼했고 그는 후에 그녀의 창의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비바안 웨스트우드는 핵 군축을 포함한 민감한 정치적 이슈들을 옹호하고 테러방지법과 빈곤층을 강타한 정부 지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그녀의 대중적 이미지를 이용했다.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2012 패럴림픽 폐막식에서 대형 '기후 혁명' 현수막을 들었고 자주 자신의 모델을 캣워크 환경전사로 변신시켰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지난 2018년 프랑스 패션잡지 <로피시엘>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현상에 도전하기 위해 패션으로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활동가로도 유명하다 |
유재부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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