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모리 하니에 |
1977년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 오트쿠튀르 조합 정식 회원이 된 일본 패션계 대모 모리 하나에가 지난 11일 도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이 지난 18일 일제히 보도했다. 향년 96세.
수십 년 동안 '나비 부인'으로 불렸던 모리 하나에가 디자인했던 럭셔리 수공예 작품들은 낸시 레이건, 그레이스 켈리 등을 비롯한 수많은 상류층 소비자들이 착용했다. 또한 그녀는 일본 여성계를 대표하는 선구자였으며 세계적인 기업을 이끈 소수 여성 경영인 중 한 명이었다.
모리 하나에의 놀라운 경력은 영화 의상을 만들기 시작한 도쿄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뉴욕과 파리 등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1977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 오트 쿠튀르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2006년 도쿄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진행된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모리 하나에는 "인류는 손으로 직접 작업할 때, 창의력은 더욱더 확장된다"고 말했다. 당시 회고 전시에서 고인의 클래식한 국화 파자마의 복제품인 핫 핑크 시폰과 실크로 만든 기모노같은 옷을 마네킹에 입혀 선보였다.
지난 1월 모리 하나에는 일본 유력지 <요미우리신문>에 기고한 특별 칼럼에서 패션 산업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요약해서 발표했다. 그녀는 칼럼을 통해 "패션은 여러분을 앞으로 더 나가도록 밀어주고,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으며, 모험을 펼칠 수 있도록 꿈을 선물해준다"라고 밝혔다.
디자이너 모리 하나에. 1974년 |
코코 샤넬과의 운명적 만남
1926년 일본 시마네현에 있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모리 하나에는 도쿄여자기독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후 디자인으로 방향을 틀었다. 1951년 도쿄 신주쿠에 있는 국수가게 2층에 자신의 첫 아틀리에를 오픈한 그녀는 일본 영화배우들의 옷을 전문적으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패션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의 전후 경제 성장에 따라, 남편과 함께 경영했던 고인의 사업도 더불어 순항했다. 특히 남편은 TV의 등장으로 영화 산업의 수익성이 떨어졌을 때, 아내 모리 하나에에게 파리와 뉴욕을 방문하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1960년대 초반 파리 여행에서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만났던 기억에 대해 모리 하나에는 생전에 "그것은 나에게 일종의 전환점이었다"라고 고백했다. 코코 샤넬과의 만남은 영감을 주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모리 하나에가 샤넬 스튜디오 들어갔을 때, 코코 샤넬은 그녀에게 검은 머리와 대조를 이루는 밝은 오렌지 의상을 입으라고 제안했다. 당황한 모리 하나에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일본의 아름다움에 대한 모든 개념은 은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접근 방식을 바꾸고 나의 드레스가 여성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패션 쇼 피날레의 모리 하나에 |
나비로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다
1965년 뉴욕에 진출한 모리 하나에는 나비를 모티브로 하는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일본 전통미를 화려한 색채로 표현한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였다. 공식적인 첫 해외 현지 컬렉션인 뉴욕 쇼를 통해 고인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의 디자인은 학이나 벚꽃, 그리고 트레이드마크인 나비와 같은 전통적 이미지에 울 슈트부터 샤프한 새틴 테일러링에 이르기까지 웨스턴 스타일을 결합시킨 것이 특징이다. 모리 하나에는 1970년 후반에 자신의 브랜드 거점을 도쿄에서 파리로 옮겼고, 국제적인 패션 관계자들에게도 빠르게 어필했다.
그녀는 나중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야마모토, 레이 카와쿠보와 같은 일본 출신 동료 디자이너와 자신과는 결이 다른 차원의 디자이너로 설명했다. 그녀는 <워싱턴 포스트>와의 당시 인터뷰에서 "파리에 살고 있는 젊은 일본 디자이너들은 열정적이고 아방가르드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전통적인 방식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인 핸드메이드에 집중한 모리 하나에는 결국 파리에 오트쿠튀르 쇼룸을 열었고 1977년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 오트쿠튀르 조합 정식 회원이 됐다.
결국 고인은 자신의 브랜드를 통해 비즈니스 제국으로 만들었고, 전성기에는 건축가 탕게 겐조가 디자인한 도쿄 빌딩 전체를 이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사세가 가울면서 이후 건물은 해체되었고 전형적인 다른 디자인의 일본식 구조물로 바뀌었다.
그녀는 요미우리신문 칼럼에서 건물을 잃고 오트쿠튀르 무대에서 은퇴할 때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회고 했다. 그녀는 "마치 나비 날개가 찢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비는 70년 동안 전 세계를 날아다닐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옷 만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모리 하나에의 시그너처 룩 나비 드레스를 입은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와 캐롤린 공주 |
끝없는 변화를 위한 열정
모리 하나에는 일본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옷을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일본 선수단의 공식 유니폼과 일본 왕실의 마사코 왕비가 지난 1993년 현 나루히토 일왕과 결혼식을 올릴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 일본항공 승무원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1985년 이탈리아 밀라노 라스칼라극장 무대에 올린 오페라 '나비 부인'의 무대 의상도 직접 제작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매출 손실이 커지면서 그녀의 패션 제국은 대부분 매각되었고 2004년 파리 아틀리에에서 마지막 의상 전시를 마친 후 회사 문을 닫았다. 하지만 모리 하나에 부티크는 도쿄에서 계속 문을 열고 영업하고 있으며 그녀의 이름을 건 향수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판매되고 있다.
강력한 여성 사업가로서, 전성기의 모리 하나에는 여전히 남성 가부장제 국가인 일본에서 보기 드문 존재였다. 다소 일찍 결혼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남편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 일본의 여성들은 심한 성불평등을 겪고 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그녀는 인터뷰를 통해 "당시 일본은 남자의 나라였다. 하지만 난 그것을 과감하게 바꾸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1996년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문화훈장을 수여했고, 2002년 프랑스 정부의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2004년 파리 오트쿠튀르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최근 숨을 거두기 전까지, 그녀는 일본의 젊은 디자이너 육성에 힘을 쏟았다. 이 역시 일본 패션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열정이었으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재부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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