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잽이 문화 독립군의 캔버스로 아로 새긴 고해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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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 변신한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

2022-08-17 오전 9:10:05

디자이너 최복호


필자가 꽁지머리 청년(?) 디자이너 최복호를 처음 조우한 것은 패션 전문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90년대 초반이었다. 대구 아틀리에서 만난 디자이너는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친밀감으로 나의 태생적 낯가림을 무장 해제시켰다. 애초 인터뷰를 위한 만남이었지만 마치 고향 선배를 만난 듯 한 편안함과 업계 선배를 만난 듯 한 반가움으로 바로 나이를 뛰어 넘어 토론을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다. 이후 청도 사과 밭으로 작업실을 옮겼을 때도 자주 찾아갔었다. 그동안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만날 수 없다가 최근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전시회 ‘디자이너의 화실; 미술에 패션을 입히다’에서 간단한 낮술(?)을 겸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음식에 간을 맞추듯 문화와 문화, 패션과 섬유, 사람과 사람, 그리고 자연과 사람의 간(間)을 맞추는 문화 디자이너이자 문화 독립군”이라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일성을 뱉어냈다.


1973년, 23살의 청년 디자이너 최복호는 패션 쇼 데뷔 무대에 시대적인 사회의식이 담긴 ‘의처증 환자의 작품 D’라는 제목의 작품을 선보였고 환경오염을 환기하는 ‘공해 오염 분해 의상’라는 제목의 의상도 발표했다. 패션 디자인에 정치 사회적인 메시지를 접목한 그의 패션은 당시만 해도 시대를 앞서간 파격 행보였다. 디자이너를 시작한지 반백년이 흘렀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담긴 컬러풀한 아방가르드 패션의 실험 정신과 도전 정신은 아들 최주영 대표에게 회사 경영을 물려 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특히 그만의 탁월하고 유니크한 색깔은 최복호가 로컬 디자이너라는 다소의 불이익과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색깔로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디자이너로 반백년을 살았지만, 쓰기와 그리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남달랐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SNS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올렸고 그림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한 취미 생활이 아닌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그림의 시작은 디지털이었다. 아이패드에 먼저 그림을 그린 후에 회화로 영역을 넓혔다.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확장한 계기는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었다. 원래 디지털 작품으로 전시가 예정되었으나, 갑작스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연기되고 시간을 벌게 되면서 회화 작품에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됐다.


디자이너 최복호


코로나-19 팬데믹이 길어질수록 디자이너의 영혼은 피폐해져 갔다. 그는 두 가지 두려움을 고민하고 있었다. 회사 매출 하락에 대한 걱정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었다. 디자이너의 예상대로 회사 매출은 반 토막 났고,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죽음을 떠올리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마음을 다스리고 이성을 회복하는 것이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행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그림이 떠올랐고, 의상을 디자인을 하던 손에 아이패드 펜이 쥐어졌다. 그의 손끝에서 형형색색의 그림들이 마치 옷이 그랬던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디자이너 최복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한마디로 ‘고해성사’다. 코로나 팬데믹이 장기화되고 삶의 패턴에 균열이 가면서 그는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았고, 그것은 곧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자기반성은 손끝을 타고 붓으로 전해졌고, 그런 시간들이 쌓이자 내면의 상흔들은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는 "생존하는 것이 강한 것이지, 강해야 생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내적 갈등이 해소되자 흐트러졌던 이성이 조금씩 회복됐다. 그것은 곧 패션 사업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었다"라고 말했다.


작품 세계는 패션쇼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다채롭다. 구상에서부터 반구상, 추상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물감이나 오브제 등 재료에도 한계를 두지 않는다. 재료의 물성을 연구하고, 색을 배합하는데도 거침이 없다. 여름날 푸르른 청년 정신으로 무장한 디자이너 최복호는 국내외 런웨이 무대에서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그 과정에 많은 천둥과 번개도 있었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런 다사다난했던 여름을 버텨낸 그는 뒤늦은 인생의 가을을 맞아 은은한 국화꽃 향기 같은 ‘화가’라는 인생을 시작했다. 그동안 고객들로 받은 사랑을 나눠 주는 그림 한 점과 벼가 허리 숙이는 겸손의 언어로 가득한 화가로 제2의 삶에 시작했다.


디자이너 최복호는 경북 구미 선산의 산골에서 나고 자랐다. 어릴 때 목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계명대 철학과를 입학했다. 하지만 목사의 꿈을 접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그는 ‘국제패션디자인학원’에서 디자인을 배웠다. 이후 전통적인 섬유패션도시 대구를 기반으로 약 50년간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한 그는 대구패션협회 초대회장과 한국패션협회 부회장 등 한국 패션계 발전에도 일조했다.  2019년부터 시각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인 최복호는 갤러리 ‘나나랜드’를 운영하며 수많은 작가들과 평론가들과 자연스럽게 만났고 이러한 만남은 그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원초적 본질을 조형 이미지로 표출하고픈 욕구를 자극했다.

패션 디자이너로 경험한 다양한 문양과 색채를 캔버스에 옮겨 바스키야 풍의 원색적인 아름다움을 내재한 창의적인 조형성을 만들었다. 마치 가을에 만발한 단풍의 화려함을 보는 듯 한 느낌이다. 분명히 그의 추상화는 그만의 개성과 조형적인 구성력을 갖추었다. 인생에서 반세기에 걸친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맞이한 최복호는 화가의 관점에서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고 깊은 사유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그의 제2의 예술적 행보는 대상을 심안으로 바라보고 감각으로 표현하려는 치열한 창작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작업실의 디자이너 최복호


Q;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에게 이번 전시회가 가지는 의미는?
A; 2020년 ‘色으로 꾸는 꿈’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면서 화가로 데뷔했다. 이번 전시는 ‘기억과 망각의 시간’, ‘해바라기를 향한 카프리스’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예술가는 자신이 가진 사고와 철학을 기반으로, 그 분야의 방식에 따라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작곡가는 작곡법에 따른 방식으로 즉 표현의 방식과 그 규칙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물로 완성되는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는 비즈니스의 측면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을 해야 했지만, 화가로서의 작업은 조금 더 자유로운 환경이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유로운 환경이 주어지면, 그게 더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Q: 디자이너 최복호의 패션 철학은?
A: 대한민국 패션 사를 집필하는 누군가가 나를 디자이너로서 분류한다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의 카테고리에 넣지 않을까 생각한다. 패션을 오로지 미학적 관점에서 결과물을 선보인 디자이너들의 카테고리가 있을 것이고, 패션의 대중화 상업화에 중점을 두었던 디자이너들의 카테고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사회적 문제를 패션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야기하는 디자이너’라는 카테고리에서 첫 번째로 평가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90년대 환경 오염문제를 고발했던 패션퍼포먼스, 대구 지하철 참사를 진혼제 형식으로 발표했던 2003년의 패션쇼 등 특히, 내 데뷔작품의 메인 테마가 ‘고발의상’이었다.


Q: 패션쇼 디자인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
A: 시대의 변화에 따라 나는 진화해왔다. 지난 49년간 100여회에 가까운 쇼를 하면서, 늘 사회적 문제 또는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모티브를 찾았다. 현재는 유투브와 미드, 국내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를 접하면서 또 내가 접하는 2022년의 세계를 보면서 영감을 찾는다.


Q: 패션과 미술의 경계는 무엇인가?
A: 패션은 비즈니스다. 말 그대로, 팔리지 않는 옷은 가치가 없다. 미술은 당대가 아니라도, 시간의 변화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도 한다. 고객을 고려해서 만드는 작업은 아니라는 뜻이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전시실


Q: 패션 디자이너 최복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A: 패션 디자이너로서는 비즈니스의 측면을 배제하고 갈 수 없다. 그래서 옷을 100벌 완성 시켜놓고도 쇼에는 40벌만 올리는 것이다. 디자이너 혼자서 작업하는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디자이너가 컬렉션을 발표할 때는, 다수의 인원이 팀이 되어 움직인다. 패션 디자이너는 순수 예술가가 아니며, 이 일들은 철저히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가로서는 혼자다. 내가 시작해서 내가 끝낸다. 그러다 보니, 화가로서는 아무래도, 그러한 사회적 문제보다는 ‘자연’이라는 내면의 본연에 충실하게 된다. 어린 시절, 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서성이던 산등성이, 들판에서의 아련함 등이 노년이 된 내게 아직까지 ‘그리움’과 ‘가슴 먹먹함’이라는 감정의 배경이 되었다.


Q: 목회자를 꿈꾸던 청년이 패션 디자이너가 된 계기는?
A: 내가 패션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어릴 적 교회 목사님이 주신 과제(교회의 미술 장식물을 만드는 작업)를 잘 만들었고, 그것을 보신 목사님이 ‘너는 나중에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라고 해주신 말씀 때문이었다. 세월이라는 먼 길을 돌아, 결국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면서, 그때의 재능과 꿈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Q: 패션과 파인아트가 만났을 때 가장 어려운 점과 희열을 느꼈을 때는 언제인가?
A: 1973년 데뷔 이후 지금까지 49년간 패션쇼를 진행하면서 늘 순수미술과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그것을 패션 오브제로 완성해왔다. 또한, 2006년 청도에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를 개소하면서, 갤러리BK를 운영해왔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을 초대하여, 기획전을 열고 그들의 생각과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교류해왔다. 큰 테두리 안에서, 미술과 패션의 영역이 서로 이어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림 작품을 있는 그대로 프린트로 찍어내서 옷으로 뚝딱 만들어낸다고 그 옷이 잘 팔리지 않는다. 미술작품을 어떻게 가공하고 변형해야 의상이라는 틀에 잘 녹여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한다. 이 지점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전시실


Q: 지금까지 회화를 패션에 응용한 그래픽 패션을 패션쇼에서 다수 선보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시그너처 룩은?
A: 하나의 의상이 재킷, 코트, 드레스 등 여러 복종으로 변형되는 ‘패턴 인버전(Pattern Inversion)’ 룩을 개발했다. 이 의상에 대한 해외 고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Q: 최복호 패션에서 청도의 과수원 아틀리에도 나름 의미가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 아틀리에를 만든 의도와 의미는?
A: 나의 청소년기에서 정서적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시골의 산등성이와 오솔길이다. 청도에 위치한 최복호 패션문화연구소 쇼룸은 사과밭 부지 1000평을 공간 디자인하여 지었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패션이 함께 조화가 되는 공간을 완성하였다. 멀리서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단순히 매장을 찾아온다는 의미가 아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다.


Q: 최복호 패션을 세계화시키는데 가장 어려웠던 점과 보람은?
A: 1980년 실크로 만든 의상을 들고 야심차게 독일 뒤셀도르프 전시회에 참가했다. 당시 후배들이 처음 해외 전시를 참가할 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벅차오를 거라 짐작했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처절한 실패 후, 오랜 기간을 준비했다. 비즈니스란 좋은 제품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해외 영업을 할 수 있는 팀을 꾸리고 공부를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2세가 회사에 들어와 여러 준비를 돕기도 했다. 그 결과, 중동, 유럽, 중국, 미국, 호주 등 7개국에 수출을 할 수 있었다. 운좋게도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리는 데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상도 받았다. 중동에는 화려한 프린트를 선호해서, 수출이 제일 좋았고, 미국은 그 마켓에 맞추기 위해, 데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디자인했으며, 중국에는 단가가 맞지 않아서, 디자인 자체를 수출했다. 의상 제작에도 감수를 해주었고, 패션쇼 준비부터 판매까지 코칭을 해주었다. ‘내가 만든 옷이 이만큼 아름다우니까, 바이어 당신들이 찾아와서 사가시오’라고 생각했다면, 결과는 처참했을 것이다. 늘 바이어가 원하는 것들을 고민하고, 그에 맞추기 위해 무엇이든 다 바꾸어 주었다. 특히, 중동지역은 바이어가 디자인에 많은 관여를 한다. ‘내가 만든 옷에 누가 감히 손을 대?’ 라고 자존심을 세우면, 결과는 뻔하다. 박물관으로 팔린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전시실


Q: K-패션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A: 수십 년 전만해도 K-팝의 성공을 예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BTS가 세계를 점령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K-팝의 성공은 싸이 혼자만의 성공도, BTS만의 재능 때문도 아니다. K-팝의 성공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예능 콘텐츠가 기반이 되었다. 영웅이 등장하기까지는 많은 요소와 환경들이 갖추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 K-패션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한국 디자이너 중 누군가가 갑자기 알렉산더 맥퀸처럼 옷을 잘 만든다고 월드스타 디자이너가 탄생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K-팝과 한국의 무수한 콘텐츠 그리고 패션이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또 분해되면서 파생되는 에너지가 쌓여 K-패션의 영웅이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Q: K-패션의 세계화에 있어 우리의 장점과 보완해야 할 단점은?
A: 아직은 정부차원에서의 지원이 절실하다. 이세이 미야케라는 브랜드가 나오기까지, 일본 정부는 오랜 기간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BTS와 블랙핑크가 뮤직비디오에서 한복을 입은 덕에 한복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과 같이, 한국이 만들어내는 문화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Q: 앞으로 2세 경영을 통해 최복호 패션이 명품으로 가야할 길은?
딸은 서울대를 나와서, 런던의 패션 명문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를 졸업하고 한섬에서 일하다가 2016년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해서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세스코’ 유니폼 디자인을 맡아서 하고 있다. 본인만의 브랜드로 우뚝 서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물론 딸이 가는 그 길은 최복호 패션이 나아가는 방향과는 다를 것이다. 아들은 최복호 패션의 경영과 관리는 물론, 패션쇼를 위한 잡다한 준비부터 해외 수출, 정부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하지만 제가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하겠다고 한다. 아들은 스스로 2세 경영인이 아니라, 디자이너 최복호의 매니저라고 말한다. 그게 재무의 관점에서건, 비즈니스 측면이건, 운전을 하는 로드매니저이건 상관없이 저를 보필하는 역할이 자신이 해야 될 일이라고 한다. 제가 디자인을 하는 동안에 더 큰 브랜드로 성장하면 좋겠다.


안산문화예술의 전당 전시실


Q: 약 50년 동안 패션이라는 한길을 걸은 레전드로서 젊은 후배 디자이너와 패션학도들에게 조언을 하신다면?
A: 반백년을 하나의 직업으로 살아왔다는 것과 늘 치열하게 디자인에 몰두하며 노력해왔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시대적 변화와 산업의 트렌드로 인한 물결에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이제 혼자 남았다. 나는 그 파도 속에서 오랜 시간을 한 곳에 버티고 서있는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고 버틴 것만으로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인정받는 나무가 되는 것은 싫다. 내 작품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뿜어내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나무로 살고 싶다. 이 이야기가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Q: 마지막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패션 외에 하고 싶은 일은?
A: ‘이 일’이 곧 ‘나’이고, 내가 ‘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다. 50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고객들을 만나고, 또 해외에 수많은 나라에서 작품을 발표하면서, 이 일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다시 태어나도 역시 목회자가 되려고 기도하고 노력하다가 결국엔, 디자이너 되어 50년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유재부 패션 에디터
UB@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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