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또는 비는 내가 어느 시공간에 있느냐에 따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문 들판이라면 식물과 농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간절한 자원이지만, 출근과 퇴근하는 도시의 직장인에게는 짜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평온한 실내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서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비에 당황하기도 한다. 아이의 순수한 눈으로 봤을 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는 현상은 경이로움이라는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
또한 비에 젖었을 때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상반된 분위기가 연출된다.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난파선에서 비는 생명을 좌우하는 요소이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가 갑작스런 비나 눈을 만나게 되면 둘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기
도 한다. 이렇게 눈과 비는 우리의 삶에 여러 특별한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비와 눈이 즐거움을 주는가, 불쾌감을 주는가의 차이는 이를 맞았을 때 몸이 젖느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진다. 몸이 젖는다는 현상은 단순히 옷이 축축해져 촉감이나 기분이 안 좋아진다는 차원을 넘어 체온을 뺏겨 건강이나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몸을 덜 젖게 하는 방수 소재의 발명은 혁신적일 수 밖에 없었다. 비 오는 날 참호에서 오랜 시간 버텨야 했던 군인들에게 트렌치 코트는 순식간에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전쟁 후에는 대중적으로 사랑 받게 된다. 버버리 사가 트렌치 코트라는 단일 아이템으로 세계적인 명품 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이렇게 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진 ‘버버리’의 컬렉션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활용한 컬렉션을 선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눈이나 비를 뿌릴 수 없으니, 반짝이는 금속성 종이나 꽃, 잎 등을 이용해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는 이미지로 그 분위기만 차용한다.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2011년 F/W 컬렉션을 시작으로 한동안 지속적으로 일명 꽃가루 효과를 활용해 다양한 피날레를 선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비에 젖는 현상을 오히려 활용했던 컬렉션도 있었다. 아직도 패션계에서 전설로 남은 컬렉션인 ‘알렉산더 맥퀸’의 1998년 골든샤워 컬렉션은 실제로 비를 뿌려 모델들이 비에 젖고 메이크업이 흘러내리도록 연출했다. 이렇게 비와 관련된 컬렉션이 다 영국 브랜드와 디자이너에게서 연출된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학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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