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가 시즌 3까지 제작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한국을 벗어나 해외 여행을 통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각자의 성격과 여행 스타일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떤 이는 즉흥적으로 일정을 정하고 느긋한 일정을 즐기고자 한다면, 어떤 이는 먼 길을 온 만큼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빡빡하게 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이는 책으로만 보던 지식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를 통해 시청자는 그 나라의 일상적인 삶인 길거리 풍경에서부터 음식, 박물관 속의 예술 작품, 문화 유산, 자연 풍경 등을 보면서 대리만족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젊은 층에서 해외여행이란 대리만족 수준이 아니다. 어느새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보편화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서유럽 국가로의 여행은 너무 흔해져 버렸고, 동유럽을 넘어 북유럽 여행을 위한 수요와 공급도 넘친다. 남들이 가보지 못한 이국적인 풍경을 찾아 중동도 가고 괴로울 정도로 힘든 비행시간을 감수하고라도 미국, 심지어는 남아메리카도 간다. 중국과 일본, 홍콩 등의 근처 아시아 국가는 주말을 이용해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다녀오는 것은 일도 아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인문학과 해외 여행의 열풍이 맞물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해외 여행에 대한 경험이 쌓임에 따라 단순히 그 나라의 음식이나 쇼핑거리, 대표적인 명소 앞에서 사진만 찍고 오는 것을 여행이라고 부르기 민망해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적어도 미술사를 공부해 건축 양식이나 명화에 담긴 뜻, 성당이 지어진 역사적 배경, 예술가의 특징 정도는 알고 가야 할 정도로 해외 여행 문화가 성숙해져 가고 있다.
미술사를 포함한 예술사, 역사, 철학, 문학과 종교 등을 포함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전통 문화란 이 모든 것이 몇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삶에 녹아 들어간 인문학의 정수이다. 패션에도 이러한 인문학이자 전통문화는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어떤 개성 강한 디자이너라 할지라도 자신이 살아온 국가나 민족의 전통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라 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대한 유산 시리즈에서 살펴본 바로는 오히려 개성이 강한 디자이너일수록 전통 문화의 가치를 가장 최신의 패션에 녹여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다만 그 전통 문화를 패션에 접목시키는 디자인 방법론이 각 디자이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비유법으로 치자면, 은유냐 직유냐의 차이였고, 좀 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미지를 활용하느냐, 덜 알려진 작품에서 출발했느냐의 차이였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은 나라 전체가 문화유산인 만큼 직접적으로 자신들의 전통 문화를 패션에 투영시켰는데, 이탈리아 문화는 지중해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아프리카와 이슬람 문화까지 섞이면서 만들어진 복합적인 문화였다. 현재는 이탈리아에 속해 있지만 근대까지 독립적인 왕국이었던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남부 문화를 대표하는 돌체 앤 가바나는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톤의 회색으로 대표되는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살펴보니 이탈리아의 동네 골목길과 잘 알려지지 않은 남부 이탈리아의 건축물의 특징이 녹아 있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이탈리아 출신이었던 ‘발렌티노’로 영입된 키우리와 피춀리 듀오 디자이너도 초기에는 ‘발렌티노’의 빨간색이나 우아한 여성을 표현하려고 했으나, 점차 그랜드 투어처럼 잘 알려진 이탈리아로의 여행이나 자국의 여성 예술가의 작품을 주제로 활용하면서 인기를 더해가게 되었다.
의외로 프랑스 디자이너에서 전통문화를 활용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것은 1950년대 이후의 현대 패션 자체가 프랑스의 문화였기 때문이었다. 마크 제이콥스에 의해 너무나 대중화 되었던 ‘루이비통’을 맡은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루이 뷔통 본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프렌치 시크를 표현하고 있다.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은 프랑스인의 삶 자체가 예술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컬렉션을 보여주었다.
네덜란드의 빅터 앤 롤프는 개념주의가 발달한 네덜란드의 미학을 닮았으며,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벨기에 출신의 라프 시몬스와 마르틴 마르지엘라, 앤 드뮐르미스터는 각각의 개성이 굉장히 강하고 달랐는데, 분석해 보자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패션 강국 프랑스 옆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일종의 몸부림이었다고 보여진다.
영국의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어쩌면 자랑스럽지 않을 신분 사회의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하위 문화와 고급 문화를 모두 끌어안았다. 또 영국 옆에서 영국과는 다른 문화를 가졌으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스코틀랜드의 크리스토퍼 케인과 조나단 선더스, 홀리 풀튼 등의 신인 디자이너들도 조용히 스코틀랜드의 문화를 녹여 내고 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구교적 특성으로 화려하고 과시적인 디자인이 발달했다면, 독일의 질 샌더, 스위스의 아크리스의 간결하고 청빈한 디자인은 신교도 국가이자 척박한 환경의 산물이었다. 미국의 제레미 스캇과 톰 포드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미국의 팝 문화, 각종 만화 캐릭터, 카우보이 문화를 담아내고 있었다. 브라질 월드컵 시즌에 알아본 남아메리카 출신 디자이너들인 오스카 드 라 렌타, 캐롤리나 헤레라의 화려함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국가에서 비롯된 최상류층의 문화였으며, 남아메리카 특유의 자연 환경을 화려한 색으로 표현 하고 있었다.
인도 출신의 마니쉬 아로라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복잡한 인도의 문화를 현대적으로 치환하는데 성공한 대표적인 디자이너였다. 일본의 꼼 데 갸르송, 홍콩 출신의 비비안 탐, 중국의 양 리는 동양의 철학과 문화를 각각 직유와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개성을 드러냈다.
이래도 전통 문화라는 단어가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가?


고학수 기자
marchberry@naver.com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