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간 세계 4대 컬렉션의 사진만이 빼곡히 올라오던 스타일닷컴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15 F/W 컬렉션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구글 번역기로 돌려 아무리 들어봐도 한글로는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 난감한 디자이너의 이름들이 줄줄이 올라왔다.
북유럽의 디자인 도시 스톡홀름과 코펜하겐, 그리고 베를린의 컬렉션이 4대 컬렉션과 더불어 소개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지, 일시적인 시도로 남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전세계 패션 피플들이 즐겨 찾는 사이트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은 이 도시들이 패션계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할 것이다.

모든 현상의 시작은 미약하다. 지금이야 세계 4대 컬렉션으로 자리잡은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의 위상이 굳건하고, 그 뒤를 이을 5대 컬렉션의 도시로 인정받기 위해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처음 파리 컬렉션이 생기고 그 뒤를 이어 밀라노 컬렉션이 생길 때 만해도 패션 후발 주자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 때문이다. 어느 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선도하는 그룹이 있으면 그 기술을 따라가려는 후발주자가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많은 패션 제조 업체들이 비용 절감의 문제로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넘어가면서 그들의 패션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관계가 그러했다.
지금은 파리 컬렉션에서 주요 패션쇼로 빠뜨리지 않고 살펴봐야 할 컬렉션인 ‘발렌티노’지만, 사실 ‘발렌티노’는 이탈리아 현대 패션 산업을 일으킨 1세대 디자이너 브랜드이다. 1932년생인 발렌티노 가라바니(Valen tino Garavani)는 이탈리아 북부의 롭바르디아 주 보게라에서 태어나 2008년 은퇴하기까지 이탈리아 패션 위상을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칼 라거펠트와 비슷한 시대를 산 이 디자이너는 독일 출신의 칼 라거펠트(1933~)나 알제리 출신의 이브 생 로랑(1936~2008)이 그러했듯 어린 시절 패션에 재능을 보여 파리로 유학을 와 공부하게 된다. 지금의 많은 패션 학도들은 4대 패션 도시를 넘어 앤트워프나 북유럽 등 다양하게 유학을 가지만 1950년대에는 파리 패션계의 위상이 그만큼 독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칼 라거펠트와 이브 생 로랑이 파리에 남아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로 들어갈 때 발렌티노는 1959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에서 고급 맞춤복 아틀리에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비즈니스의 동반자인 지안카를로 지아메티를 만나 파트너십을 맺고 지금의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발렌티노’를 설립한다.
이탈리아에서만 활동하던 그는 국내를 넘어 1964년에는 미국으로 진출하였고, 당시 재클린 케네디가 고객이 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리고 1968년 마침내 패션의 본고장 파리에 첫 부티크를 열고, 1970년대에는 일본으로까지 진출하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패션 업계에 영향력을 가진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발렌티노’ 브랜드의 확장은 이탈리아 패션 산업의 발전과도 맞물린다. 고급 맞춤복으로 독보적이었던 파리 오트쿠튀르의 위상은 중산층의 증가와 고급 기성복의 요구로 점차 떨어졌다.
오트쿠튀르란 초고가의 옷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몇 백 시간 공들여 섬세한 장식을 하기 때문인데, 기성복에는 옷 한 벌 한 벌에 오트쿠튀르 만큼의 투자를 할 수 없다. 따라서 점차 좋은 소재가 각광을 받게 되고, 디자인적으로는 활동에 불편함이 없으며, 장식이 많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 옷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디자이너 기성복 시장이 확대되면서 1969년 마침내 밀라노 컬렉션이 시작되었다. 6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와 영국 패션업체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기지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는 이미 봉제 노하우와 오랜 역사의 피혁 수공예 기술, 세계 최고의 원단 시장을 가진 최고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이에 잠재되어 있던 개성 있는 디자인의 브랜드들이 한 곳에 모여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하자 밀라노는 세계 패션 도시로 급부상했다.
고국의 패션 산업의 발전이 발렌티노에게도 힘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여성들의 마음을 잘 아는 그의 디자인의 힘이 가장 컸다. 때로는 소녀같이 아기자기하면서 단아하고 순수한 이미지를 드러내고, 때로는 고혹적이며 우아하며 고급스러운 여성미를 드러낼 수 있는 그의 디자인에 어떤 여성이든 마음을 뺏길 수 밖에 없었다.

‘발렌티노’의 디자인은 섬세한 장식이 많은데, 이러한 장식의 복잡함을 상쇄시켜 주는 깨끗한 여백미가 공존한다. 그의 시그니처 아이템인 옷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리본, 움직임에 나풀나풀 거리는 러플, 섬세한 레이스와 자수, 비즈 장식 등은 도화지 같은 깨끗한 면과 만나 대비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발렌티노’를 상징하는 색들인 하양, 검정, 빨강은 어떤 시즌이든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다양하게 변형된다. 순백색부터 미색까지 다양한 하얀색의 스렉트럼의 디자인은 단아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만들어 준다. 검정색의 의상은 속세에서 벗어난 성직자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장식이 더해져 더없이 아름답다. 무엇보다 발렌티노 레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빨간색의 의상들은 어떤 시즌이든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원피스로, 드레스로 수없이 변형된다.
이탈리아 브랜드지만 이제는 파리에서 어떤 브랜드보다 프랑스 브랜드 같은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는 ‘발렌티노’. 이탈리아의 장인정신은 프랑스의 수공예적인 장식과 오트쿠튀르적인 섬세함과 만나 더없이 환상적인 세계를 이어 가고 있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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