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크(chic)’라는 용어가 패션잡지를 떠다닌다. 대강 의미는 알지만 그 뜻이 정확히 와 닿지 않아 사전을 본격적으로 찾아봤다. 단순히 영어 단어일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프랑스어 사전에 있는 말이다.
명사로는 ‘(특히 그림 그리는)기교, 솜씨, 재주, 요령, 멋, 유행’을, 형용사로는 ‘멋진, 근사한, 세련된’ 등의 의미를 가지며 구어로 명사 앞에서 ‘아주 좋은, 기막힌’, 또는 ‘상냥한, 친절한, 마음씨 좋은’이라는 뜻을, 감탄사로는 ‘(만족, 기쁨을 나타내어) 좋다, 멋지다’라고 한다. 물론 영어로도 ‘멋진, 세련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시크’를 ‘멋’이라고 한다면 프렌치 시크, 파리지앵 시크,
심지어는 록 시크, 헤로인 시크 같은 정체불명의 단어들도 좀 더 이해하기 수월하다.
그렇다면 습관적으로 쓰이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라는 표현도 파고 들어보자. ‘무심’이란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없다’와 타인의 일에 걱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의 의미이다. 바로 이 두 번째 뜻이 실마리를 제공한다.
즉, ‘무심한 듯 시크하게’를 ‘프렌치 시크’, 즉 프랑스적인 멋과 연결시키는데 사실은 프랑스라는 국가의 특징이기 보다는 파리 같은, 아니 정확히는 대도시적 특성에 가깝다. 그러니 그것이 파리든, 런던이든, 뉴욕이든, 심지어 서울이든 나타날 수 있는 태도이다. 프랑스에서도 다른 지역 사람들이 파리지엥들은 차갑다, 인정머리 없다는 평가를 한다는데, 타인의 일에 무관심한 것은 바쁘고 삶이 팍팍한 어느 도시든 나타나는 현상이다.
좀 더 파고들자면 ‘무심한 듯 시크하게’는 격식과 품위, 교양 같은 높은 차원의 처세술이 요구되는 사회에서 필요한 멋이다. 이 표현은 심지어 르네상스 시대의 관습과 사상을 담은 최초의 개론서였던 ‘궁정론’에도 등장할 정도이다. 1507년 카스틸리오네가 쓴 궁정 처세술이자 정치 교양서인 이 책에는 궁정에서는 ‘무심한 듯 시크한’ 태도를 보이라는 표현이 있다. 품위 없게 타인의 일에 궁금한 것은 못 참고 오지랖 넓게 간섭하고 싶은 태도를 자중하라는 의미이다.
시크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점을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19세기에 출간된 이 책에서 ‘귀족다운’이라는 의미의 ‘시카(chicard)’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단순히 도시민인 파리지엥 보다 고급스러운, 타고난 귀족이기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을 통해 획득한 중산 계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크’라는 단어가 갖는 본래의 ‘멋’을 넘어 절제된 단순미, 도시적인 세련미, 지성미까지 의미가 확장되는 것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종합적으로 ‘시크’는 품위와 격이 있는, 교양 있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한 동안 프랑스와 영국,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 등 각 국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논란의 핵심은 우리나라만 물질적인 부를 중산층을 규정하는 잣대로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부채 없이 30평형대(99㎡)의 아파트 소유, 월 급여 500만원 이상, 2000cc 급 중형차 소유 등이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이었다.
한편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각각 하나의 외국어, 스포츠, 악기를 다루고 즐길 줄 알며, 미식의 국가답게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나만의 요리’가 있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었다. 영국이나 미국도 약자를 돕고,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며 불의, 부정, 불법에 저항할 것 등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가 중산층의 기준이 되었다. 즉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살려는 노력이 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인 것이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따지자면 미국은 5만불, 영국, 프랑스도 1인당 GDP가 4만불이 넘는 국가이다. 또한 200여 년에 걸친 산업혁명을 통해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인 풍족함은 그들로 하여금 유물론적인 부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데 중점을 두는 사회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프랑스 디자이너나 프랑스 출신의 유명 인사를 인터뷰할 때 문학이나 철학, 예술 등의 인문학적인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러한 것들을 취미로 즐기는 생활 태도를 보이는 표현들이 등장하나 보다.
세계적인 프랑스 명품 브랜드라고 프랑스인 디자이너가 그 수장을 맡게 되는 경우는 드물게 되었다. 명품 시장에 거대 자본이 투입되면서 더 많은 자본을 끌어당기기 위해 대중 명품 시대가 열렸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할리우드 영화처럼 자본이 많이 들어가 더욱 볼거리가 많은 패션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루이비통’은 제 2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에서 조각품 같은 옷을 디자인하던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임명했다. 아직 그가 ‘루이비통에서 선보인 컬렉션은 2회 밖에 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시크의 의미를 살펴 보면서 조금은 그의 방향성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루이비통’ 컬렉션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힘들이지 않는(Effortless), 수월해 보이는, 자연스러운 옷 입기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느 정도 공식으로 자리 잡은 스트라이프 셔츠, 플랫 슈즈, 작은 스카프, 라이더 재킷이나 트렌치 코트 등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컬렉션이 프렌치 시크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위에 열거한 아이템들처럼 간단히 걸쳐도 멋스러운 새로운 클래식 아이템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누구 입맛에나 맞는 글로벌화되고 대중화된 명품 시대에 다시 한번 고급화되고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루이비통’이 선택한 것은 프렌치 시크이다. 이 ‘프랑스적인 멋’을 가장 잘 나타낼 디자이너로 니콜라 제스키에르를, 새로운 뮤즈로는 자타공인 현대적인 프렌치 시크 배우로 인정받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선택했다. ‘발렌시아가’에서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인연이 ‘루이비통’의 새로운 시대를 열 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