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개방으로 세계의 경제 판세가 바뀌고 있다. 협소한 시각으로 보면 중국의 약진은 21세기에 들어서야 일어난 것이라고 보이겠지만, 지난 세기를 제외한다면 중국은 오랜 시간 동안 세계 경제의 우위를 차지해 왔다. 넓은 땅, 그에 비례한 많은 인구로 인한 거대한 시장, 수많은 발명품, 전국 각지에서 수집된 귀한 공예품 등은 서역과 유럽인들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기원전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 중동으로 흘러간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가구, 공예품 등은 17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귀족과 왕족의 필수 아이템으로 떠오르게 된다. 상인과 선교사의 활동에 의해 중국의 상황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유럽인들에게 중국은 선진 국가로 비춰졌다. 물건뿐 아니라 중국의 철학, 정치 같은 무형적 가치도 부러움의 대상이자 따라 하고픈 모델이었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미국이나 북유럽 국가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는 이렇게 17세기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중국풍 양식이다. 당시 중국은 청나라가 지배하던 시절이니 그들이 반했던 것은 청대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은 로코코 시대 후반기로 청나라의 화려하고 섬세한 장식은 그들의 구미에 더욱 잘 맞았을 것이다.
당시 유럽 귀족들이 얼마나 중국풍의 라이프 스타일을 선호했던지 당시 지어진 궁에는 중국 자기나 타일로 장식한 방을 만들었으며, 중국에서 수입한 가구로 방을 꾸미고, 중국풍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차를 마시거나 중국 전통 의상을 입고 경극을 관람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렇듯 약 400여 년 전부터 유럽에 소개 된 중국 제품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그들의 생활에 조금씩 스며들어갔다. 중국풍이 유행 한데는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 선진문물에 대한 동경과 소유욕 등이 작용했다. 당시 유럽에 소개된 청화백자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지금의 로얄 코펜하겐 같은 세계적인 도자기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서양 디자이너들에 의해 끊임없이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중국풍의 의상이 선보여지는 것은 이렇듯 그들의 역사에 남아있는 흔적 때문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국적이면서 고급스럽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한 이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 디자이너에게는 잠깐 바람이 불어 영감을 받았을 때 한 시즌의 주제로 선택하는 것이지 중국인이 아닌 이상 지속적으로 선보이기 쉽지 않은 주제이다.
그런데 이런 거대한 중국의 문화 유산을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컬렉션을 진행하는 중국 디자이너가 있다. 뉴욕 컬렉션에서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비비안 탐(Vivienne Tam)이다.
1957년 중국 관동지방, 광저우에서 태어난 비비안 탐은 세 살이 되던 해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건너가 중국식 교육과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된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의 문화가 혼재된 홍콩에서의 삶은 그녀의 컬렉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녀가 광저우 출신으로 홍콩에서 교육 받았다는 것은 그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데 가장 큰 골격이 된다. 1500년대, 외국의 요청에 의해 명나라 시대부터 개방된 광저우는 전통 있는 무역항으로, 중국 동남 해안가, 3개의 강이 만나 바다로 흘러 드는 곳이다. 훗날 아편을 불태워 영국에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중국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한 광둥성은 지리적으로 대외를 향해 개방된 모양을 하고 있다.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전 세계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특징은 해외 교류에 있어 필요충분조건이 되어 왔다. 지금도 대외 개방의 정도에 있어 중국 전체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미 수 세기 동안 상하이와 함께 중국의 관문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남문화의 특징을 다원성·포용성·변이성·선도적·실무적이라고 정의한다. 일찍부터 개방된 광저우 덕분에 관동 지역의 사투리인 광둥어는 동남아시아 화교사회나 미국의 차이나타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퍼져있는 중국인들과 소통하는데 중요한 언어로 정착하였다. 영남(嶺南)은 중국 남방 오령산맥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재의 광둥성·광시성 전체와 후난성·장시성 일부를 아우른다. 험준한 산맥 이남이라는 그 지리적 특징으로 오랜 기간 동안 중원과 다른 문화를 유지해 왔다.
광둥어, 중국표준어인 보통화, 영어 세가지 언어가 공용어이며, 다양한 음식으로 상징되는 문화의 다양성과 개방성, 197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홍콩에서 비비안 탐은 10대 시절을 보냈다.
1997년 홍콩반환을 앞둔 1980년대부터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해외 이민 열풍이 불어 10년간 6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 비비안 탐도 미국으로 건너가 1994년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하고 1995 S/S 시즌을 시작으로 뉴욕 컬렉션에서 중국적인 모티브가 중심인 이미지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비비안 탐의 컬렉션은 직관적으로 중국의 문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곤룡포나 용, 구름, 박쥐, 대나무, 벚꽃처럼 동양적 정서가 가득 담긴 다양한 문양들, 청나라 시대의 복잡하고 화려한 가구를 연상케 하는 자수, 소나무와 산, 물의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동양의 풍경화와 같은 이미지를 이용하여 동양적 분위기를 잔뜩 머금은 패션을 선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전통복식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현대적인 소재의 사용, 옷 패턴과 색의 변화로 동시대적인 감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 복식의 패턴을 중심으로 동양의 모티브를 포인트로 사용하여 전세계인이 착용하는데 문제 없으면서도 이국적인 이미지를 선보일 수 있도록 했다. 오래 전 유럽인들의 마음을 훔쳤던 시누아즈리가 현대적 패션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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