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사이에 낀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이 문제가 어렵다면 힌트를 드리겠다. 중립국하면 떠오르는 나라? 바로 스위스다.
지금부턴 연상 퀴즈다. 스위스하면 생각나는 것은? 배낭 여행객이라면 융프라우, 인터라켄의 아름다운 자연을, 유럽 역사에 대해 지식이 있는 사람은 쮜리히, 제네바 등의 도시들을, 남성이라면 시계와 스위스제 맥가이버칼을, 또 누군가는 인상적인 스위스의 국기와 그와 반대되는 적십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크리스(Akris)’가 스위스 브랜드라는 사실을 지금부터라도 알고 있으면 좋을 것이다.
스위스는 엄밀히 말하면 북쪽으로 독일, 동쪽으로 리히텐슈타인과 오스트리아, 남쪽으로 이탈리아, 서쪽으로 프랑스와 접하고 있으며, 영세중립국을 표방하고 있다.
어릴 때는 스위스=중립국이라고 막연히 외웠는데 어느 정도 머리가 굳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저렇게 큰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스위스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아크리스’에 대해 조사를 하다 보니 이 ‘아크리스’가 탄생한 생갈렌이라는 지역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게 되었다. 생갈렌(St. Gallen, Sankt Gallen)은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생갈렌, 또는 상트갈렌, 또는 장크트갈렌으로 읽는다. 그도 그럴 것이 스위스의 공식 언어만 해도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옛 라틴어인 로망슈어까지 4가지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이렇게 다양한 언어만큼 다양한 지방색을 갖추고 있어 ‘작은 유럽’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스위스 동북부에 위치한 생갈렌은 스위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다는 독일어권이며, 전체적인 도시 분위기도 ‘독일보다 더 독일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퍼뜩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었으니, 바로 ‘질 샌더’였다.
얼핏 ‘질 샌더’와 ‘아크리스’의 디자인에 어떤 공통점이 머리에 그려졌다. 바로 최상의 소재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간결한 디자인과 완벽한 재단으로 옷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정말 ‘아크리스’와 ‘질 샌더’와의 관계는 이렇게 독일어권으로 묶어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스위스의 다른 위대한 유산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우선 스위스의 생갈렌이라는 매력적인 도시에서 시작된 ‘아크리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생갈렌의 관광정보를 찾아보면 두 가지 키워드를 접할 수 있다. 생갈렌 수도원 부속 도서관과 섬유산업이다. 우선 생갈렌 수도원 도서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부속 도서관이며,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도 꼽힌다. 생갈렌의 도시 명칭은 이 도시를 만든 성직자 성 갈루스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수도승 갈루스는 612년 당시 아무것도 없던 이 지역에 문화와 가톨릭을 전파하게 된다. 갈루스의 작은 방을 중심으로 설립된 수도원은 중세 유럽의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초기에 만들어진 수도원 건물은 이미 무너져버렸지만, 18세기 들어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으로 다시 지어진 대성당과 부속 도서관은 이후에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수 백년 동안 필사본으로 작성되어 무려 14만권의 고서를 보유하고 있는 이 도서관은, 8세기경 양피지로 만들어 금박으로 씌여진 필사본이나 9세기에 그려진 초기 악보 형태처럼 엄청난 세월을 견뎌온 유산들이 가득하다.
한편 생갈렌은 섬유산업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했던 스위스의 대표적인 부촌이다. 생갈렌의 섬유산업은 8세기경부터 린넨으로 시작되었으며, 특히 15세기부터는 자수를 넣은 린넨 제품으로 유명해졌다.
18세기 들어 면이 유행하면서 영국으로 산업의 중심이 넘어가기 전까지 유럽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생갈렌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텍스타일 뮤지엄에 가면 정교하고 아름다운 린넨의 발전사를 흥미롭게 만나볼 수 있다.
생갈렌의 자수는 전세계 공급량의 50% 를 차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났으나, 많은 부자들을 탄생시켰던 섬유산업은 과거에 비하면 주춤한 상태다. 디자인은 파리나 뉴욕, 이탈리아 등지에서 해오고 생산은 인력이 저렴한 곳에서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크리스’를 비롯하여 ‘샤넬’, ‘디올’, ‘조르지오 아르마니’ ‘엠마누엘 웅가로’ ‘지방시’ ‘니나 리치’, ‘생 로랑’ 등 고급 브랜드 제품들에는 생갈렌의 자수 제품이 들어간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첫 취임식때 미셸 오바마 영부인이 입었던 연노랑 코트의 자수도 바로 생갈렌의 제품이었을 정도로 최고급 자수 제품의 명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생갈렌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인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자, 동시에 기계화를 통한 쇄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 역사로 쌓인 노하우와 명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생갈렌의 건축물에는 독특한 특징이 드러난다고 한다. 바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화려한 가정집의 수공예 발코니들이다. 건물 벽 앞으로 튀어나온 발코니의 장식은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부의 상징물이었다.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부유한 도시였던 생갈렌에서는 건물에 더 많은 창문을 내고, 화려한 조각들로 꾸몄다. 조각들은 사람들을 놀리는 내용부터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는 자랑을 담아 이국적인 풍물로 꾸민 발코니까지 다양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 유산을 가진 생갈렌에서 탄생한 브랜드 ‘아크리스’는 그러나 장식적인 요소보다는 정제된 디자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나마 매 시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하학적 무늬로 환원된 시스루 의상들이 이러한 생갈렌의 장식적 요소의 현대화라고 볼 수 있겠다.
고학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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