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Great Heritage 35

새로운 예술을 해야 한다는 현대 일본 예술계의 거장 ‘오카모토 타로’의 역할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레이 가와쿠보의 패션 세계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특징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꼼 데 가르송’ 매니아들을 ‘까마귀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마치 죽음을 연상시키는 검정색과 기괴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꼼 데 가르송’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적 특이성이 과연 일본의 전통 문화와 연관이 있을까 궁금하던 차에, 우연히 ‘일본산고’라는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일본산고’는 박경리 선생이 일본에 관해 쓴 글들을 모아 펴낸 책으로 선생이 파악한 일본인들의 정신세계, 미학관, 문학의 특징들이 설명되어 있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아래서 자라며 학교를 다녔다. 일본어와 일본문학을 배우고 소설을 쓰며 세상을 곱씹었던 선생이었기에 일본인의 세계관을 파악하는데 아주 흥미로운 사실들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인으로서 일본과 한국의 정서를 비교하여 옆 나라이면서도 이다지도 다르게 형성된 의식구조의 차이를 일본의 건국 설화에서부터 파고들어 갔다.
뜻밖에도 일본 근대 문학을 분석한 글에서는 레이 가와쿠보의 미학관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었다. 레이 가와쿠보가 대학에서 미술과 더불어 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선 박경리 선생은 ‘만세일계’ 사상이 바로 일본 의식 구조의 시작점이라고 지적했다. 만세일계란 일본 천황가의 혈통이 지금까지 단절된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크게 중요시되었고 대일본제국헌법의 제1조에도 만세일계라는 용어를 기술하여 법적으로 강조하였다.

근래에 들어서는 현실적인 사료나 기록 등의 연구를 통해 매우 허술한 주장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천황에 대한 논란을 금기시하는 일본 내에서는 본격적으로 의제화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인들이 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음을, 절대적인 가치관에 매달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 빼고는 다 변하는 세상에서, 예외 없음, 절대적이라는 말 자체가 기만이다.
그들은 완벽한 형식, 틀을 만드는 데는 뛰어난 소질을 보인다. 그 틀을 만드는데 너무 진을 빼서인지, 정작 내용은 비어있거나 그 사상이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카모토 타로도 결국 유럽의 추상성을 일본에 소개했을 뿐 그들만의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특히 일본 근대문학에는 ‘탐미주의’와 ‘죽음’에 대한 일본인들의 예술관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것이 레이 가와쿠보의 작품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문학의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갇혀버린 사회에서 도피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선함도 진실함도 결여되어 있고 오히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농후합니다’ 라고 박경리 선생은 ‘일본산고’에서 언급했다.
우선 일본인들의 ‘탐미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선생은 괴기와 탐미는 약간씩 다르지만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했다. ‘감각에 충격을 주는 것에서 그렇고 보편성과 휴머니티의 결여, 윤리 부재, 반도덕적인 것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하지만 출구가 없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것은 총괄적인 인간의 삶이 대상이기보다 심층에 깔려 있는 인간성의 한 부분, 그 의식을 끌어내어 그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시각에 엄청난 충격을 주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또는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은 생각을 남기게 하는 레이 가와쿠보의 컬렉션과 닮았다. 그녀가 인터뷰를 극도로 꺼리는 것도 사실 충격적인 형식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녀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사실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없다는 의미 아닐까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듯한 음울하고 가라앉는 분위기 또한 일본 근대문학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한이 쌓이면 울분을 토하지만, 일본인은 안으로 계속 그 슬픔을 삼킨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체념하게 되고, 자기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고, 그로부터 마조히즘을 느낀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일본의 문학은 삶의 문학이 아닌 죽음의 문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선생이 쓴 일본산고 안의 소제목처럼 그것을 풀어낼 ‘출구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 많이 쓰는 말 중에 ‘스고이’라는 단어는 굉장하다는 감탄사인데 사실 그 본뜻은 소름 끼치게 처참한 정경에 대한 것이다.
난도질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감탄이며, 처연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굉장하다는 우리의 말에는 수치와 양감이 그 내용이지만 스고이는 정경을 나타낸다. 일본도의 푸른 칼날의 번득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 괴기적 감각의 표현이다.
레이 가와쿠보는 컬렉션에서 음악과 조명을 이용해 ‘스고이’한 분위기 조성한다. 물론 거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극단적으로 음울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분위기만으로는 깊은 내용을 찾기 어렵다.
박경리 선생은 '특이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에 비하여 편협하다는 의미와는 다르게 세계가 좁은 것은 사실이다.
일본문학 중에 그 구성에 있어서 치밀하고 뛰어난 묘사력, 세련된 문장 등 대단히 우수한 작품이 있으나 늘 주제가 약한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본문학의 전반적인 경향이 아닌가 싶다’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레이 가와쿠보의 컬렉션은 정말 특이하다. 옷의 형태나 모델 이미지, 컬렉션의 분위기 모두 일반적인 패션쇼와 비교할 수 없으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 특이한 형태의 의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정확하고 정밀한 재단 기술은 뛰어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과연 심오한 것인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에서 그치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학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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