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지오 아르마니 (Giorgio Armani)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가 많은 이탈리아가 디자인 강국이라는 사실을 다시 증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교양 차원에서 꼭 알고 있으면 좋은 디자이너가 있다. 패션계에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있다면, 제품 디자인계에는 알레산드로 멘디니가 있다. 특히 두 디자이너 모두 밀라노라는 도시가 배출한 세계적인 디자이너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귀엽고 유머러스하며 화려한 색채의 디자인으로 알려진 멘디니와 우아하며 절제된 디자인으로 정평이 난 아르마니는 모두 80대의 노장 디자이너가 되었다. 1931년생의 멘디니와 1934년생의 아르마니는 고향은 다르지만, 어린 시절 밀라노로 이주한 이후 계속 이 도시와 함께 발전해 왔다.
그들 모두 무솔리니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탈리아의 패망으로 시대적으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개인적 상황은 상반되었다. 멘디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앤티크 가구를 좋아하고 수집했다. 그림 수집 취미가 있는 어머니, 할아버지, 삼촌들이 수집한 200여점의 그림을 위한 화랑까지 있어 그곳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던 어린 멘디니는 자연스럽게 많은 예술, 문화적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반면, 아르마니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 피아첸차는 그 전략적인 위치 때문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공 폭격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전쟁, 피란, 살아남기 위한 투쟁의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파쇼연맹 직원으로 전쟁 후에 정치적 입장 때문에 징역살이를 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현명하고 세련된 감각을 지닌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도 깔끔하고 정갈한 차림으로 아이들을 밝게 키웠다.
서로 다른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밀라노라는 도시는 두 디자이너가 성장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이탈리아는 로마 멸망 이후 각각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렌체나 밀라노, 베로나, 베니스 등의 도시는 독립된 문화와 경제를 가진 개별적인 도시국가였다. 이렇게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강력한 왕정 없이 작은 도시국가로 발전해 오던 이탈리아는 마침내 1871년 통일된다.
그러나 지방 분권적인 성격이 강하고, 비슷한 시기 통일된 독일처럼 탄탄한 산업이 뒷받침되어 군국주의로 강력하게 합쳐진 것도 아닌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파시즘으로 쉽게 빠져버렸다.
멘디니와 아르마니가 대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당시 밀라노는 산업화의 중심지가 되면서 이탈리아의 경제와 문화가 집결되고, 무언가 새롭게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이탈리아는 내적으로 통일과 산업화의 과정이 지속되었다.

이탈리아가 패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의에 빠지기 보다 무언가 만들어보자는 건설적인 분위기가 생겨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이러한 움직임은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나 베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밀라노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산업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밀라노는 상승하는 도시였다. 서유럽 중심으로 발전을 이루었던 20세기 전반지 미술의 영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알프스 산맥 이남으로 내려왔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던 유명한 라 스칼라 극장이 재건축되었고, 1946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작품을 시작으로 공연이 재개되면서 밀라노 음악계는 부흥을 맞았다. 브레라 미술관은 고전미술을 비롯해 현대미술까지 소개하면서 밀라노 미술이 붐을 일으키며 미술의 중심이 되었다.
건축잡지 ‘도무스(후에 멘디니가 편집장을 맡게 된 세계적인 잡지)’는 당시 건축이나 디자인, 새로운 디자인 이론을 소개하면서 밀라노의 건축과 디자인의 혁신을 주도하였다. 네오 리얼리즘 영화도 이 시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화적 현상이었다.
이러한 밀라노의 발전적인 분위기는 멘디니와 아르마니, 당시에 디자인을 하는 젊은 층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멘디니가 종사한 산업 디자인계와 아르마니가 속해있던 패션 디자인계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기세 등등했던 독일의 기능주의적 디자인은 1960년대 이후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을 대체할 만한 스타일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 디자인계는 잠시 혼란을 겪었다.
이때 빛을 제공해 준 것이 알레산드로 멘디니를 비롯한 이탈리아 디자이너들의 실험적인 디자인 운동이었다. 20세기를 장악했던 딱딱하고 건조한 기능주의 디자인에 비해 이탈리아 디자인이 보여준 새로운 스타일은 충격적이면서,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멘디니는 키리코, 데스틸, 칸딘스키, 폴 클레,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 몬드리안 등 1900년대 현대회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오늘날 범위가 다양한 ‘구성composition’의 독창적인 사례가 되었다.
아르마니도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미래주의자들의 역동성, 바우하우스의 직선적인 특징,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형상의 해체에 영향을 받았다. 패션계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사회,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하고, 노동계로 뛰어들면서 과거 여성들을 속박하던 의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윤리를 재정립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허리선이 헐거워졌고, 새로운 활력이 생겨나던 시기였다. 패션계는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프랑스 패션이 세계 패션의 기준이었다. 이탈리아 패션의 경우, 명성은 드높았지만, 세부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60년대 말을 특징짓는 미학적 충격들 중에서 페미니즘은, 아무리 온건한 페미니즘일지라도, 불편하고 양식화된 옷을 입고 있는 연약하고 화려한 여성들의 보편 세계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
이렇게 두 거장은 같은 시기, 같은 도시 밀라노에서 전혀 다른 스타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디자이너 모두 이탈리아, 특히 르네상스의 문화적 유산이 그들의 디자인에 다른 방식으로 오롯이 녹아 들어있다.
고학수 객원기자
marchber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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