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누보하면 파리의 청동색의 지하철역이나, 그보다 좀 더 세심한 곡선의 기둥과 철제 난간으로 장식된 타셀 하우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진 1) 이 아르누보의 대표 이미지인 타셀 하우스가 벨기에 출신의 대표적인 아르누보 건축가 빅토르 오르타의 작품이다.
막연히 아르누보하면 파리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아르누보는 벨기에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는 1890년대에서 1910년까지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이지만 유럽과 미국, 남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제각각의 나라에 맞춰 다양하게 발달한 양식이다.
따라서 나라마다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며 발전하였는데,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아르누보로, 미국과 영국, 러시아에서는 모던 스타일,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 오스트리아의 제체시온슈틸,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모데르니스타 등 다양한 이름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아르누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곳이 벨기에였고, 양식이 완성된 곳도 1890년대 초반의 벨기에였다. 지난 기사에서 언급했다시피 벨기에는 영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나라였다.
산업혁명은 인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으로 영국은 이전까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거대한 자본과 세계적인 영향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가들의 화려한 생활과 달리, 보통의 사람들의 생활은 끔찍했다. 특히 이 시기의 대중들이 사용하는 제품들은 미숙한 기계 사용과 무조건적 소비를 위해 끊임없이 생산되는 제품들로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즉, 자본가들이 사용하는 제품과 대중이 소비하는 제품의 미적, 질적 차이가 심했다. 예를 들자면 대중들에게는 기계로 찍어내는 고무 대야, 또는 플라스틱 바구니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윌리엄 모리스는 라탄 바구니 같은 아름다운 수공예 제품을 제안한 것이었다. 모리스는 아름답고 유용성 있는 디자인을 창조하여, 고상한 예술과 대중의 간격을 좁히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의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기계에 반대되는 수공예, 즉 사람의 손으로 말이다. 목적은 좋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은 벨기에로 넘어오면서 ‘아르누보’ 양식을 탄생시킨다. 일상생활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목적은 같았으나, 가장 큰 차이는 기계와 철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시작은 윌리엄 모리스의 열성적 지지자였던 벨기에의 건축가이자 이론가, 디자이너였던 앙리 발 데 벨데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세리뤼에-보비, 빅토르 오르타 등은 초기 아르누보 양식을 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189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전시회는 책의 편집 디자인과 삽화, 실내장식, 식기와 액세서리, 포스터와 함께 드뷔시의 음악까지 연주되어 아르누보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회로 기록되었다. 이렇게 벨기에에서 시작된 아르누보는 파리, 독일 등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렇듯 벨기에에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격동의 시기에 현대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아르누보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국가적 유산을 라프 시몬스는 조용히 패션으로 풀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질 샌더라는 ‘독일’적 이미지가 큰 브랜드에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아르누보의 특징은 ‘백합의 줄기를 생각나게 하는 긴 감각적인 곡선’이나 ‘뱀장어 양식’이라고 불릴 정도로 구불구불한 선, 담쟁이나 당초 무늬, 화염 등 자연에서 가져온 형태로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고유한 장식성과 유기적인 움직임이 있는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라프 시몬스는 이러한 아르누보의 특징적인 형태를 직접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차용했다. 만약 직선적인 형태가 강한 ‘질 샌더’에서 아르누보의 유기적인 곡선과 장식이 그대로 패션으로 표현했다면, 그는 6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그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아르누보의 정신이란 무엇일까?

벨기에 아르누보의 시작 인물인 앙리 발 데 벨데는 ‘미와 유용성은 공존한다’고 주장했으며, ‘미를 위한 미의 추구는 위험하다’고 했다. 따라서 라프 시몬스는 상징성이 드러나는 무늬나 표면 장식을 사용하기 보다는 옷의 구조를 변형시키거나(사진 2), 아예 새로운 형태의 장식을 개발해 냈다. (사진 3) 벨데는 ‘상징적 장식은 포기해야 한다’고도 했다. (사진 4)

이러한 일련의 주장은 패션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적 절대 왕정의 장식성에 대한 반기이자, 아르누보 이전과 이후 패션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또한 ‘형태와 구조는 절대적인 논리 속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사진 5), 제품의 윤리적인 구조와 재료 사용의 논리성 추구, 재료의 세련됨은 자체의 본질적인 성격에 의해 한정된다’는 벨데의 말은 질 샌더의 이상과도 잘 맞아 떨어졌다. (사진 6)
앙리 발 데 벨데가 바우하우스의 전신인 바이마르 예술학교 교장이었으며, 후에 그의 제자 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초대 교장을 맡게 된 것도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디올’로 옮겨간 라프 시몬스의 컬렉션에서 아르누보뿐 아니라 벨기에가 나은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영향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고학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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