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이상봉」 대표)이 세컨드 브랜드 「라이(LIE)」를 론칭했다. 내달 중순 서울 롯데백화점에 팝업스토어를 낸다. 이미 지난해 중국과 유럽, 미국 등지에는 수출을 시작했다.
「이상봉」이 30~40대를 타깃으로 한다면, 「라이(LIE)」는 20~30대를 위한 영 브랜드다. 그런데 브랜드 명이 재미있다. LIE는 ‘LIE SANG BONG’의 LIE도 되지만 영어로 ‘거짓말’이란 뜻이다. 백남준이 “예술은 사기야!”라고 설파했던 것을, 이상봉은 “패션은 거짓말이야”라고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패션 역사를 담은 특별전 ‘이상봉&LIE SANG BONG’을 서울 강남 신사동에서 펼치고 있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진화를 주도하는 사람
“인터뷰할 시간도 없다”는 그를 서울 역삼동 그의 본사에서 만났을 때 가죽 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든 바지에 중절모 차림으로 나타났다. 사옥 내에서 작업하다 왔건만, 취재진 앞에는 그렇게 성장하고 나온 것이다. 즐거운 웃음을 날릴 수밖에.
그는 ‘자기 색깔이 강한 디자이너’로 불린다. 그러나 이 시선을 은근슬쩍 즐기면서도 거부의 몸짓을 한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싶지 않다는 거다. 오히려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티스트로 불리길 원한다.

‘이상봉&LIE SANG BONG’전에 전시된 그의 페루 사진집 ‘GATE’에는 그가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으로 찍은 현지 사진들이 다채롭게 담겨 있다. 그 사진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유를 구가하는지 절실히 다가온다.
그는 이렇게 썼다. ‘머물러 있는 것은 패션이 아니다. 항상 새로운 진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디자이너’라고.
기자는 94년 그의 도발적이었던 첫 컬렉션을 기억한다. 어둠 속에 전라의 전위예술가를 세워 ‘태(胎)’를 표현했던 작품. 배우를 꿈꾸었던 시절, 공연을 며칠 앞두고 도망치듯 무대를 떠났다는 그는, 초기 무대에서는 연극에 대한 애착을 진하게 남겼다. 그 자신이 연출가이자 퍼포머였다.
이날 쇼는 이후 이탈리아 꼴레지오니에 소개됐고, 그 인연으로 다시 독일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96년 현대무용가 홍신자씨가 마련했던 죽산국제예술제에서 그는 센세이셔널한 행위예술을 보여주었다. 초여름 늦은 밤 산중턱에 마련된 무대에 큰 항아리를 설치, 그 속에 물을 담고 그 속에 형광염료를 넣어둔 후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항아리 속에 몸을 담그고 나오면 흰옷들이 무대위에서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도록 하는 연출을 했다. 같은 해 국제현대음악협회가 주최한 제24회 범음악제 ‘팬뮤직페스티벌’의 ‘무용&퍼포먼스’ 피날레에 참가한 그는 스스로 반라의 차림으로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난 영원한 37세, 무대는 잠재된 에너지 일깨우는 원천”
이상봉은 왜 이렇게 무대에 대한 애착을 보일까.
“무대는 내 안에 잠재된 에너지를 일깨워주는 원천”이라고 그는 말한다.
연극배우가 되고자 했으나 포기했던 그는, 그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여러 무대에서 퍼포먼스를 보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때는 셔츠 주머니와 모자에서 새가 나와 날아오르는 기발한 쇼를 하기도 했다.
그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열정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에게 나이를 물으면 “37세”란 답이 돌아온다. “왜 37세라고 계속 우기냐?”고 캐물으면 “37세 때 정말 힘들고 고민이 많았던 때였다. 뭔가 창조해내야 한다는 강박 관념, 쇼는 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안되던 시절, 스스로가 무능하다는 생각에 견딜 수 없던 시절이 나의 출발이자 전성기였기에 그때에 머물러 있고 싶다”고 말한다.
열정의 나이에 머물고 싶은 사람이 그 뿐이랴. 당시는 상처였겠지만, 이제는 빛나는 훈장이 된 37세의 그 시절을 마치 할머니가 구수한 옛날 이야기 보따리를 열어놓듯 그의 구수한 입담은 술술 풀렸다.
번민의 밤을 몇날 며칠을 지새다가 ‘나를 버리자, 부족한대로 인정하자’고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이 그를 살렸다는 것이다.
“요즘이 최고 전성기 인 것 같다”고 운을 떼자 “아니다. 37세 때 그 고통 속에서 나를 스스로 인정하기 시작하고 힘들었을 때 그때가 내겐 황금기였다. 지금은 수없이 그리고 스케치하던 그때의 열정만큼도 안돼 그 시절이 그립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앙드레김 이후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라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묻자 “그분은 그분대로 자신의 궁전을 짓고 우아하게 사신 분이고, 나는 지금 디자이너들과 소통하면서 디자이너연합회도 만들어 새로운 발전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란 선문답이 돌아왔다.
◇자연-미술-음악-문학-연극 모두가 패션의 자양분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서울 신대방동에서 농사짓던 부모님 아래 5녀 1남의 외동아들로 천둥벌거숭이로 자랐다. 개울에서 가재도 잡고 멱도 감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무능이 싫었다”고 말하는 그는, 어려서는 반항적인 끼와 예술적 끼가 다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학교때 미술반을 했으나 서울예고 시험은 부모님도 모르게 준비없이 음악 전공으로 시험을 봐서 낙방했다. 고교때는 문학 청년을 꿈꾸면서 습작을 했고,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학과 입학 후에는 무대에서 소리지르고 몸을 던지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배우를 꿈꾸었으나 공연 며칠 전 무대가 무서워 도망치듯 무대를 떠났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선집을 운영하는 친구를 돕다가 우연히 양장 일을 배우게 됐고, 국제복장학원을 다니며 패션디자인계에 입문했다. 1983년 중앙디자인콘테스트 입상은 소심한 청년을 180도 바꿔 놓았다. 1985년 ‘이상봉’ 패션회사를 차리고 누에고치를 나온 나비처럼 본격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패션 철학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옷 만들기’
그의 패션 철학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옷을 만드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살아있는 감성과 정신을 옷이라는 매개를 통해 타인에게 전이시키고 공유하는 것, 이것이 디자이너로서 그의 진정한 꿈이다.
그는 규정된 스타일보다는 그가 갖는 흥미와 관심, 감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 유전자에는 5000년의 역사가 살아 흐르고 있다. 전통은 계승되고 간직되어야 한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이어야 한다.”
청산유수와 같은 그의 대답은 디자인에 대한 물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고 물이어야 한다. 내 스타일, 정신, 영혼도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다닐 수 있길 바란다. 디자인은 물과 바람처럼 항상 새롭고 가벼워지길 바란다.”
◇패션 영감은 ‘창의적인 생각’에서 그는 어디서 패션의 영감을 얻는 것일까.
그는 한 사람의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우주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에 비유한다. 삶에 대한 의혹, 꿈과 현실 사이의 무수한 갈등과 고뇌가 예술가의 창의력과 결탁하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가능성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옷을 위한 영감이 되어 패션디자이너로서의 길이 된다고 믿는다.
“어디에서건 영감을 얻는다. 때와 장소가 없다. 영화 보면서, 공연, 전시 보면서, 또 외국에선 박물관, 벼룩시장, 전통문화 등 새로운 문화는 내게 창조하고픈 도전 의식을 일깨운다.”하지만 그는 우리 문화의 소중함, 패션과의 접목, 대중화에 쑥 빠져있다. 그가 한국적 모티브를 시작한 것은 85년 ‘이상봉’ 브랜드 론칭할 때부터다. 당시도 백의, 태극, 한복 등 한국적인 모티브로 작업을 시작했다. 87년 승복과 한복을 접목한 옷을 발표했고, ‘패션 페스티벌 1991’ 컬렉션에는 판잣집과 창틀을 모티브로 한 원피스를 발표하기도 했다. 샤머니즘과 무당도 그의 소재가 됐다. 그러다가 터진 것이 2005년 한글 소재 컬렉션이다.
◇한글 패션으로 파리서 각광
파리에서 열린 한 패션쇼에 한글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는 세계적 유명 디자이너 반열에 들게 됐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소리꾼 장사익씨, 미술가 임옥상씨의 편지 필체를 그대로 인용해 옷을 만들었는데, 세계가 반응했다.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이후 서예가 국당 조성주씨의 필체를 의상에 담았다. 시인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도 옷에 담았다. 붓의 터치와 선의 아름다움을 접목한 추상적인 작품들도 내놨다.

“처음에는 한글을 ‘Korean alphabet’으로 표기하던 외신들도 이젠 ‘Hangul’로 쓰고 있다. 문화관광부도 세계에 내놓을 한국의 문화 상품에 한글을 담지 않았다가 나중에 한글을 넣었다.
“보람을 느낍니다. 다들 외국어를 남발하는데, 저는 한글로 해외에서 인정받았으니까요. “
처음에 사군자로 전시를 하는데, 파리 현지 반응은 “왜 일본 것으로 하느냐”는 식이었다. 한글은 그런 시비가 없어 좋았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공동으로 쓰이는 문화는 누가 빨리 세계화 하느냐에 따라 세계속에서 자기 것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래서 이상봉은 한글 외에도 단청, 산수화, 한국가구, 아티스트, 한복, 자수, 매듭 등 우리 것을 세계화시키려고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 노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욘세, 레이디 가가도 팬

그의 고객은 비욘세, 레이디 가가 등 다채롭다. 김연아도 그의 한글 의상을 입고 스케이팅을 한 적이 있다. 두바이에서는 샤넬, 발렌시아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인기있다. 4년 전에는 러시아의 한 작곡가가 모스크바의 700석 극장에 30여명의 단원과 함께 이상봉만을 위한 공연 무대를 마련하는 열성을 보인 적도 있다.
앞으로 그의 꿈은 무엇을까. “앞으로는 소외받는 사람들의 옷도 만들고 싶다”는 그는, 경영 능력은 어찌할 수 없어 경영자를 영입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후배들에게는 “먼저 한국에서 인정받을 것”을 주문한다. 서울 컬렉션으로 먼저 인정받은 후 해외 진출을 해야 한다는 것. 지금은 세계적인 안목을 갖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그는, 이제 디자이너는 옷을 잘 짓는 능력을 넘어 지휘자겸 크리에이터이자 브랜드 디렉터라고 강조했다. “인문학적 코드, 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2013 F/W 뉴욕 컨셉코리아, 파리 프레타포르테 등 준비에 시간이 부족하다며 자리를 떴다.
이화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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