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변방으로 치부되는 독일
외유내강 브랜드 파워로 무장
밀라노, 파리, 런던, 뉴욕, 그리고 도쿄, 앤트워프까지 이제 패션은 더 이상 특정 국가 혹은 패션이 주도하는 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독일은 늘 패션 변방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소비력 풍부한 아시아 시장이 패션계의 큰 손으로 등장하면서 과거 유럽과 미국 중심의 패션 지도에 아시아의 영향력과 취향이 반영되고 서울과 홍콩, 상하이, 싱가포르가 주목받는 패션 도시로 성장하고 있음에도 늘 정체된 느낌이 있는 독일 패션가는 그 조용함 때문에 오히려 궁금증을 자아낸다. 하지만 샤넬의 장기 집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칼라거펠트의 고국이자 모던한 미니멀리즘의 대명사 질샌더, 감각적이고 팝업 걸적인 매력적 아이디어로 사랑받는 윱(Joop), 글로벌 시장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남성복 휴고보스의 본고장 독일이 정말 패션의 방관자일까?

은밀하게 성장하기
대답은 달을 볼 것인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인가의 차이다. 무슨 소리냐고? 지난 글로벌 금융 불안기에 매출 부진과 유동 자본 압박에 몰려, 매각까지 고려했던 휴고보스는 급격한 매출 회복에 힘입어 매각설을 잠재우고 글로벌 유통망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프라다 그룹과 지독한 알력을 겪으며 좌초했던 질샌더는 유니클로와 제휴한 J+컬렉션을 통해 소비자와 시장과 소통하는 미니멀 정서를 다시금 입증했으며, 윱을 떠난 디자이너 볼프강윱은 꾸튀르 라인 분더킨드(Wun derkind)를 론칭, 성공적인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패션 지향적인 소비자 흐름에 맞춰 상업성과 실용성으로 무장한 독일 신진 디자이너들이 베를린 패션주간에 활기를 더하고 글로벌 스포츠웨어 시장에 큰 몫을 담당하는 아디다스와 푸마, 글로벌 데님 시장에서 독일 데님의 자존심을 살리고 경쟁하는 데님 브랜드 클로즈드(Closed), 20년 전 론칭되었던 팝 꾸튀르 라벨 슈마허(Shumacher)가 베를린 패션주간에 다시 귀환을 알린 지금, 독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넓은 패션의 보폭을 과시하고 있다.
또한 베른하트빌헬름, 마커스루퍼, 스테판쉬나이더, 다니엘라/아넷펠더 등 파리, 런던, 앤트워프, 뉴욕 패션가에서 성공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칼라거펠트 , 질샌더의 뒤를 이어 독일 패션의 파워를 이어가는 젊은 피로 그 미래가 밝다. 이밖에 칭케(Cingque) 뀌(Qui) 마크케인(Marc Cain) 르네레자드, 윈저(Windsor) 등 브랜드도 글로벌 시장을 노리고 있는 독일 패션계에 힘을 실어주는 역군이다.
다시 말해서 화려한 프레스 마케팅과 글로벌 확장 전략의 팡파레가 펼쳐지는 패션계의 조명 뒤쪽에서 독일 패션은 특유의 실용성과 조용함으로 차근차근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감각과 실용성, 그 조용한 파워
특히 슈마허의 부활은 실용성이 바탕이 된 독일 패션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해준다. 감각성과 실용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슈마허는 세미 글래머러스한 스타일로, 스마트한 직장 여성의 캐주얼 데이웨어로서 젊은 독일 소비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실제로 베를린 패션 유통가에서 슈마허는 실용성과 감각적 디테일, 다양한 패브릭의 믹스 등을 무기로 젊은 소비자와 뛰어난 소통력을 보이고 있어, 실용성과 감성을 함께 추구하는 글로벌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감안하면 실용성이 바탕이 된 독일 패션의 잠재력은 무한하다.
베를린 패션가를 밝히고 있는 젊은 독일 디자인 군단에는 독일 연예인들의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등극한 랄라베를린(Lala Berlin), 카비아르고체(Kaviar Gache) 등이 눈길을 끈다. 2004년 론칭된 랄라베를린은 테헤란 출신의 디자이너 레일라피데야쉬가 지휘하고 있으며 독일 패션 특유의 담대함과 페미닌한 엘레강스, 스타일리쉬한 감성이 믹스된 독일판 어번쉬크룩의 대명사로 헐리웃 스타 리즈위더스푼이 즐겨 찾는 캐시미어스카프와 실크드레스, 카프탄 등이 유명하다. 디자이너 조하나퀼/알렉산드라피셔롤러가 진행하는 카비아고체는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한 여배우들의 이브닝 가운과 백으로 유명세를 더한 가장 핫한 브랜드 중의 하나.
이밖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한 벌은 갖고 있다는 데님 브랜드 클로즈드는 30년 전 론칭된 이후 가장 ‘적절한 핏’을 무기로 남녀 소비자들을 사로잡고 있는데 얼마 전 할리우드 스타 사라제시카파커가 클로즈드 하이웨이스트 페터드 진을 입은 파파라치 컷이 등장, 할리우드까지 그 파워가 확산되는 분위기다.
클로즈드는 과도한 트렌드나 실험 보다는 몸매를 살리는 핏을 중시, 너무 타이트하거나 헐렁한 핏에 지친 남성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 주고 있으며 데님과 치노, 빈티지풍 스웨터, 슬림한 레더재킷 등의 머천다이징에 주력하고 있다.

절제된 창의성, 생활 속의 패션
독일 패션의 산실 베를린에서는 1년에 두번 베를린 패션주간을 통해 신진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발굴되고 스트릿웨어 박람회 ‘브레드앤버터’를 빛내는 패션 수 백 개의 패션 라벨들의 활발한 경쟁은 지치지 않는 독일 패션의 발전 원동력이다. 독일 특유의 담대함과 실용성을 바탕으로 신선하고 독특한, 우아하고 순수한, 화려하고 자신만만한 그들만의 컬러를 섞어내며 보여주는 패션이 아닌 ‘생활 속의 패션’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 하이엔드 꾸튀르보다는 레디투웨어가 독일 패션을 지탱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전통적인 패션 정서가 푸마나 아디다스 같은 스트릿웨어풍 스포츠웨어와 적절한 감각과 절제미가 돋보이는 남성복 휴고보스, 캐주얼 스포츠웨어 스트레네세 등을 글로벌 패션가에 뿌리내리게 한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사실 1920년대만 해도 독일 베를린은 750여 개의 공장에서 18만 명의 직원을 보유한 최대 텍스타일이자, 꾸튀르 파워하우스였지만 나치스의 등극과 함께 공장에서 일하던 대다수의 유대인 디자이너들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디자인 인력난을 겪게 된다.
2차 대전 패망 이후 물자와 인력이 모두 부족하고 국가 재건에 치중하게 되면서 1960년대 이후 합리적인 가격대의 레디투웨어 가 중심이 되었고 실용적이고 미니멀한 특유의 스타일이 독일 패션의 색깔로 자리 한다.
시장과 소통하는 독일 패션
흔히 독일 패션을 ‘섹시와는 거리가 먼, 질서와 실용성을 중시하는 지성적’ 패션이라 표현하지만 휴고보스나 에스쁘리, 질샌더, 아디다스/퓨마 등 시장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한 것은 독일 패션의 은밀한 파워를 생생히 증명하는 증거다.
물론 독일 디자이너들의 전형적 특징이라 할 절제된 크리에이티비티는 과도한 쇼맨쉽이나 드라마의 부족으로 파리나 밀라노, 런던보다 침체된 느낌을 주지만 현실과 함께 하는 크리에이티비티는 동시에 독일을 세계 2위의 패션 수출국으로 업그레이드하게 한 바탕이기도 하다.
예정현 기자
- Copyrights ⓒ 메이비원(주) 패션인사이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