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비쳤다고 봄은 아니다. 루부탱 특유의 시그니쳐 레드솔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루부탱 대 입셍로랑 간의 상표권 침해 소송이 루부탱에 우호적이던 재판 과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루부탱의 패소로 판결났다. 이로써 ‘루부탱=레드솔‘ 공식은 깨어지고 어떤 브랜드든 원하면 레드솔을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레드솔에 대한 단독 저작권을 보호받고자 했던 루부탱은 또 다시 카피에 관대한 패션 저작권 잔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루부탱, 레드솔 저작권 소송 패소
사건의 시발점은 입셍로랑 2011 크루즈 컬렉션에 등장한 Tribute, Taboo, Woodstock 슈즈 모델에 루부탱과 유사한 레드솔이 부착되었고 이를 본 루부탱이 디자인 카피 의혹을 제기하며 맨해튼 법원에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소송을 진행한 맨해튼 연방 법정 판사는 루부탱이 2008년 ‘래커칠 한 레드솔’에 대한 상표권을 취득한 것은 인정하지만 패션계가 동일한 컬러나 장식, 디자인 등 미적 정서에 따라 자유롭게 차용, 경쟁하며 발전해왔기 때문에 레드솔을 오직 루부탱 만의 전유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레드솔을 루부탱만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은 화가 모네의 그림에 블루 컬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른 화가는 블루 컬러를 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설명을 덧붙여 디자인이나 장식, 특정 컬러에 대한 상표권/저작권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이는 곧 하이스트리트 업계는 물론 하이엔드 브랜드 역시 크리스천 루부탱 특유의 레드솔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장을 발부한 것과 다름없다.
패션, 혹은 예술적 크리에이티비티에 대한 저작권 인정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존갈리아노 대 윌리엄클라인의 광고 캠페인 소송에서도 드러난다. 2007년 당시 디올을 지휘하던 존갈리아노가 진행한 광고 캠페인 콘셉과 분위기가 사진과 페인팅을 접목시킨 미국 사진 작가 윌리엄클라인의 작품을 카피했다는 의혹을 샀고, 윌리엄클라인이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35만 유로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자 존갈리아노 측은 예술적 상상력이 우연히 닮을 수 있지만 카피는 아니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카피 논란을 비켜갔고, 윌리엄클라인 측과 법정 밖에서 사건을 해결한 바 있다.
아무튼 디자인 카피/상표권 침해 소송에서 자유로워진 입셍로랑의 해당 슈즈 모델은 이번 소송으로 톡톡히 마케팅 효과를 얻었고 다른 슈즈 제조 업체들도 레드솔을 부착한 슈즈 생산에 동참할 것으로 전망되어 루부탱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나마 판결 과정에서 루부탱의 시그너쳐 레드솔이 패션계에 미친 공적과 영향력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보였다는게 위안이 될까?
영악한 디자인 카피
패션계의 오랜 숙원인 저작권 인정 및 보호에 대한 희망을 가졌던 패션계는 이번 판결이 오히려 패션계에 만연한 디자인 카피에 대한 변명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면서 디자인 카피가 더욱 노골화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패션계는 항상 디자인 창의성을 부르짖지만 디자인 카피는 늘 패션계와 함께 성장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하이엔드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빌려와 소재와 디테일만 살짝 변경, 매출을 구축하는 패스트 패션 업계는 디자인 카피의 주범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실제 디자인 카피가 인정된 경우는 제한적이다. 일례로 지난 27년간 50여 차례 디자인 카피 소송에 노출되었던 하이스트리 리테일러 Forever 21은 한 번도 소송에서 패소한 적 없고, 카피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실제로 안나수이는 Forever 21에 의해 20번 이상 카피되었고 다이앤폰퍼스텐버그, 트로바타, 폴리+코리나, 3.1필립 림, 벳시 존슨 등도 Forever 21의 매장에서 끝없이 유사한 카피 제품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텍스타일 프린트부터 디자인, 컬러까지 흡사한 의류에 대해 카피 혐의가 인정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H&M, 자라, 톱숍 등도 런웨이에 오른 디자이너의 제품을 영리하게 ‘손봐’ 재생산, 매출을 구축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자라 매장에서 프라다 풍 블래이저를 찾거나 H&M 매장에서 스텔라매카트니 풍 셔츠나 니트를 구입하거나, 톱숍에서 클로에풍 원피스를 찾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톱숍은 2007년 클로에의 디자인을 카피했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매장에서 해당 제품이 철수되고 클로에 측에 1만2000파운드의 손해 배상과 소송 비용을 지불한 바 있다. 카피 제품은 클로에가 런웨이에서 선보였던 양쪽 포켓 작업복 스타일의 옐로우 원피스로 클로에 제품 185 파운드, 「톱숍」 제품 35 파운드라는 가격에만 차이가 있을 뿐 디자인은 흡사했다.)
물론 리바이스처럼 리벳이나 포켓 디자인, 혹은 스티치가 조금만 닮아도 저작권 침해 소송을 벌이며 상표권 보호에 적극적인 업체도 있지만 대다수의 디자이너 및 패션 브랜드들은 서로에게 아이디어를 얻고, 재해석하는 디자인 관행 앞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디자인 지적 재산권 인정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완전히 똑 같은 디자인이 아니라 ‘유사하지만 차이점이 있는 정도’로 영악하게 디자인 카피를 하고 이를 자유로운 디자인 재해석이라고 주장할 경우 디자인 카피 혐의를 피해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브랜드 로고가 상표권으로 보호되고 특정 패브릭이나 프린트에 대한 저작권 인정은 긍정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벨크로, 지퍼 등 특정 기능성 장치에 특허가 인정된다는 정도.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최근의 디자인 카피가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해지고 있다면서 오랜 디자인 카피 경험을 통해 ‘디자인 카피 혐의’나 ‘상표권 침해’ 논란을 피해갈 수 있는 정도에서 교묘하게 꽤나 그럴싸한 카피 제품으로 진화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이들은 심지어 자신의 런웨이 무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하이스트리트 업계에서 디자인 카피를 자행, 생산에 들어간다면서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를 아무렇지 않게 훔치는 관행을 끊기 위해서라도 디자인 저작권 보호가 긴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음반이나 출판, 의학 부문의 지적재산권이 강조되고 있는 것과 달리 패션계는 지적 재산권을 인정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드러난 디자인이 특정 개인이나 업체가 법률상으로 재산권을 인정받기 힘든 관행이 좀처럼 깨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패션계에 등장한 특정 디자인이나 디테일, 컬러, 패턴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변모되고 재활용 되는 특성을 갖고 있고, 오랫동안 기존의 디자인을 활용하고 재창조하면서 성장해 온 만큼 특정 디자인에 대해 특정인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다.
실제로 매 시즌 하이엔드 런웨이에서 조차 서로 다른 디자이너 및 브랜드 간에 ‘디자인 창의성의 우연한 일치’를 보여주는 컬러와 디자인, 분위기가 자리하고 있는 것만 봐도 패션계의 상호 디자인 ‘관찰(!)’이 일종의 암묵적 관행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패션계에 디자인 카피가 만연하고 상표권 침해 소송이 끊이지 않아도 디자인 카피 고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이처럼 ‘디자인의 기원’을 딱 잘라 말하기 힘든 패션계의 진화 과정이 한 몫을 한다.
일각에서 패션 트렌드라는 공통 분모가 결국 유사한 디자인을 낳는 모체라며 패션계에 트렌드가 존재하는 한 디자인 카피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나름 일리가 있다.
예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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