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품의 조건
명품과 실용성.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명품 브랜드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실용적인 면으로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아 성장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최고의 명품으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샤넬만 해도 허리를 조이지 않는 무릎길이의 치마와 어깨에 멜 수 있는 핸드백으로 여성에게 시대에 부응하는 활동성을 부여했다. 물론 우아함을 잃지 않으면서.
한 시대의 패션 유니폼으로 등극한 아이템들은 실용성과 어떤 스타일에도 어울리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루이비통의 스피디 백과 트루 릴리전 청바지, 샤넬 2.55백, 페라가모의 바라 슈즈, 브랜드명과 상품명이 동일화 된 롱샴, 버켄스탁과 닥터 마틴, 유난히 추운 올 겨울 국민 아이템으로 등극한 어그 부츠까지.
우리나라에서 90년대 중, 후반을 풍미한 프라다백도 그렇다. 포코노라는 나일론 소재로 만들어진 백팩은 가죽가방보다 가볍고, 질기고, 커피를 쏟아도 쓱쓱 닦아내면 되는 실용성과 캐주얼과 정장, 어디에든 어울리는 일거양득의 디자인으로 그 시대의 3초백이었다.
패션 밖에서 패션을 바라보다
그런데 사실 이 가방이 나온 것은 70년대 말이었다. 정치학도였던 미우치아 프라다가 파산 직전의 가족 기업을 물려받으면서 다른 브랜드와의 차별화를 위해 색다른 소재를 찾으면서 시작 된 것이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원래 정치학도였다. 어릴 때부터 패션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어 정치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대학을 다닐 때인 1970년대는 정치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공산주의의 이념은 물질만능과 성공지향적인 가치관에 반대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이념으로 떠올랐다. 자신의 신념을 중시하던 미우치아 프라다도 이탈리아 공산당원과 이탈리아 여성 연맹의 일원으로 적극적인 활동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극적으로 시위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중산층인 자신의 신분과 공산당원의 이상의 괴리에서 고민을 많이 했다. 평소대로 입생로랑의 의상을 입고 시위에 나간 사진이 전국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로 치면 명동 한복판에 외할아버지가 창업주인 고급 가방 매장이 있는 부잣집 딸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여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미우치아 스스로 생각해도 괴리감이 느껴지는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시작은 최고급 가죽 가방
온전히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싶었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타인에게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신념과 패션에 대한 애정 모두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타인의 생각보다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던 미우치아의 성격은 지금의 프라다 패션 디자인에도 나타난다.
브랜드 ‘프라다’의 시작은 미우치아의 외할아버지 마리오 프라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3년 밀라노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갤러리에 개장한 ‘프라다’는 거북이, 코끼리, 해마, 다양한 종류의 악어, 뱀 등 세상의 진귀한 가죽들로 만든 고급 가방 제품들로 인기를 끌었다.
스칼라 극장 근처에 자리했던 지리적 이점으로 밀라노의 명문가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극장과 함께 꼭 들러야 하는 매장이 됐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이 변하면서 점차 고급 제품을 찾는 수요가 줄었다. 게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가업을 물려받으려는 아들이 없어 미우치아 프라다의 어머니와 이모가 매장 운영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정치와 패션에서 수많은 고민을 했던 그녀가 우선 부모로부터의 경제적 독립해야겠다고 생각을 단순화하여 파산 직전의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업을 물려받은 미우치아는 가방을 꼭 가죽으로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졌다.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그녀에게 가죽 가방은 사치스럽고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우치아는 실용적이면서 어디에나 어울리는 가방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소재가 포코노 원단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만든 트렁크를 감싸 보호하던데 쓰던 방수천이었다. 천막이나 낙하산 등을 만드는 군수품 전용 공장에서 아주 가는 나일론사로 만든 소재였다. 당연히 가죽보다 훨씬 싸고 실용적이었다.
당시 나일론을 고급 명품 가방의 소재로 쓰겠다는 발상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경제적 호황기와 맞물려 실용적이며 어떤 옷에 들어도 멋진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각광 받기 시작했다.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본격적으로 브랜드 ‘프라다’를 맡게 되었을 때 미우치아는 한 젊은 청년을 만나게 된다. 그는 ‘프라다’가 ‘전통’과 ‘고급 가죽 가방’이라는 작은 영역에만 머물지 말고 좀 더 큰 시각을 갖도록 조언한다.
후에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이자 사업 파트너가 되는 파트리치오 베르텔리는 지금의 ‘프라다’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미우치아를 자극했다.
외할아버지의 고급 가죽 가방의 영역에만 머물 뻔 했던 프라다는 베르텔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구두, 여성복, 남성복, 스포츠 라인으로 점차 영역을 넓혔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옷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옷을 어떻게 만드는지, 디자인을 어떻게 전개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다.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만의 패션 철학이 확고했던 미우치아 프라다는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패션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텔리는 이러한 미우치아의 안목을 믿었고 자신의 사업적 능력을 더해 프라다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어 가고 있다.
미우치아 프라다와 베르텔리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프라다는 여전히 가방만 만들고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항상 새로움을 선보이는 프라다 컬렉션을 못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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