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수단으로 어음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 상거래에서 오랜 관행이다. 화폐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휴대가 간편하고 이용하기에 편리했다. 또 지금도 한꺼번에 많은 원부자재를 구매하는 제조업체 입장에서 소요자금이 몰리는 현상을 피할 수 있다. 자금력이 약한 업체도 약정된 지불기일 이전에 영업을 해서 자금을 마련, 맞추는 방법으로 상거래의 규모화를 기할 수 있다.
이외에도 어음의 순기능은 예나 지금이나 적지 않다. 그러나 어음은 우리나라 등 극소수 국가에서만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어음의 가장 큰 문제는 높은 이자다. 은행에서 어음을 할인하는 경우 통상 연리 7∼9% 정도로 할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채시장을 통해 운용되는 어음의 할인율은 통상 연리 30%다. 아주 신용도가 좋은 어음의 경우 15% 정도에 융통이 되지만 신용상태가 떨어지는 경우 40%를 넘기도 한다.
어음거래는 사채시장을 배불리는 수단이 될 뿐 결재를 해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 치명적이다. 받는 쪽으로 보면 연리 30%의 100만원짜리 어음으로 통상의 105일 만기 결재를 받을 경우 이자만 8만7천500원이 나간다.
최근 대부분의 상거래에서 20%의 마진이 남지 않는다고 볼 때 마진의 절반이 어음할인으로 날아간다. 더구나 경기가 악화되면서 150일이 넘는 어음이 상당수 융통된다는 점에서 심각성은 더하다. 현실적인 상거래에서 20%의 마진율은 마지노선이다. 경비를 떨고 나면 순이익은 5% 미만이다. 이 때문에 어음 결재를 염두에 두고 원부자재를 납품하는 경우 어떻게든 마진율을 30∼40% 이상 붙여야 한다. 그래야 최소 20%의 마진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조업체의 생산단가는 터무니없이 올라간다. 소비경기 위축으로 저가의 가격경쟁을 벌여야 하는 업계에서 30∼40%의 마진이 붙은 원부자재로 제품을 만들면 경쟁력이 없다. 그래서 장사를 잘해도 남는 것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밑지고 장사를 해야 한다. 실제 원부자재 거래에서 어음을 없앨 경우 사입가의 20% 이상을 개선할 수 있다. 장기불황 속에서 이제 패션기업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원가절감뿐이다.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만큼 동종 업체가 늘어나고 매출은 없어 출혈경쟁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가절감은 인력감축, 원부자재 사입비 절감, 운영비 절감 등이지만 인력감축이나 운영비 절감은 이미 빠질 대로 빠진 상태다. 남은 것이 있다면 원부자재비의 절감뿐이다. 원부자재비를 절감하려면 어음을 없애고 현금결재를 해주는 대신 싸게 공급받아야 한다.
지난 여름 브랜드를 매각한 C사는 연간 약 180억원의 매출을 올려 업계에서 나름대로 유망한 업체였고 동종의 경쟁업체에 비하여 점별 매출순위에서 항상 상위를 유지했다. 1년의 결산에서 보면 불과 2∼3억원의 소액 적자였지만 8∼9년에 걸쳐 계속된 적자가 개선되지 않아 결국 브랜드 매각을 결정하는 아쉬운 사건이 발생했다.
적자의 가장 큰 요인은 경쟁사 대비 비싼 원부자재의 사입가 때문이었다. 이 회사가 어음을 없애고 현금결재로 바꾸어 원부자재의 사입가를 낮추었더라면 연간 최소 5억원 이상의 흑자를 낼 수 있었을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현재의 장기불황 속에도 탄탄한 자금력으로 영업을 확장하고 있는 D사는 오랜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자금전문가를 영입해 어음을 없애고 현금결재 체제를 만들면서 회사의 경영상태가 현저히 개선됐다.
그러나 계절성 자금 흐름 기복이 심한 패션업계에서 어음을 없앤다는 것은 어렵다. 하절기에 매출은 줄고 자금소요는 많은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이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업은 살아 남고 해내지 못하는 기업은 계속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은 고사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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