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색을 직접 쓰는 것을 직접화법이라고 한다면, 다른 색을 쓰면서도 원하는 느낌의 색을 유도하는 것을 간접 화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색상에서 간접 화법이 가능할까? 장 폴 고티에는 다양한 색을 쓰면서도 단일한 색 느낌을 성공하고 있다. 그는 가히 색에 있어서 간접 화법의 달인이라고 할 만하다.

제한된 색속에서 다양성을 구현하다
쓸 수 있는 카드가 많다는 것은 유리한 일이다. 수 천만 가지에 이르는 색을 대하고 보면 꼭 그런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많은 색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아끼지 말고 이색, 저색 많이 쓰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색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을 때는 그러한 생각이 안드는 것이 이상하다.
존 갈리아노의 경우처럼 색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색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면서 화려한 색을 연출하고 싶은 욕구가 당연히 생긴다. 하지만 모든 디자이너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색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제한된 범위의 색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하면 디자인의 조형적 인상이 정리되고 개성이 뚜렷해 보이기 때문이다.
샤넬은 이미 검은 색으로 성격이 굳어진 경우이고, 아르마니같은 경우도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색으로 인상이 정리되어있다. 이렇게 무채색에 가까운 색을 중심으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패션은 많지만 특정한 색깔의 인상을 중심으로 색을 제한해서 쓰는 디자이너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장 폴 고티에 빼고…
장 폴 고티에는 거의 프랑스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이지만 그는 프랑스 디자이너 답지않게(?) 넓은 범위의 색을 쓰지 않는다. 그의 패션 디자인이 색에 있어서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패션 디자인이 넘나드는 색의 범위는 보기보단 제한 되어있다. 생각 없이 보면 아주 화려해 보이지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그가 구사하는 색들은 거의 특정한 색의 범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이다. 한정된 범위에서 색을 골라 쓰게 되면 안정감은 있겠지만 고리타분해진다. 반대가 되면 장식성이나 화려함이 강화된다. 그런데 특정한 범위 내에서 색을 쓰면서도 다양성을 구현할 수 있다면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려하고 다양한 색의 테크닉을 쓰면서도 일정한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장 폴 고티에는 바로 이런 어렵고도 대단한 일을 자신의 패션에 일관되게 구현해온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고동색의 고티에
자! 다음 그림 을 한번 보자.
<그림 1>을 보면 한 쪽은 파란색이 주조고, 한 쪽은 고동색이 주조색이다. 전혀 다른 색을 가진 패션 디자인이지만 왠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란색 옷과 빨간색 스타킹의 옷에서 고동색 계통의 냄새가 난다. 파란색과 빨간색은 분명 대비가 심한 색인데 여기서는 서로 어깨를 걸치고 고동색을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빨간색처럼 보이는 색들이 좀 낮은 명도를 가지면서 고동색의 사촌 쯤 되어 보인다. 파란색도 사실은 순 파란색이 아니라 채도가 비교적 낮은 파란색이다. 중간 중간 들어가 있는 노랗고 빨간 꽃무늬의 색깔이 채도가 낮은 파란색에 침투해서 고동색의 DNA를 이식시키는 것 같다.
패션 계에 데뷔한 때부터 지금까지 장 폴 고티에는 줄곧 고동색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색을 써왔다. 설사 고동색을 쓰지 않더라도 고동색(?)같은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 것이 그의 디자인에 일관된 특징이었다. 이렇게 특정의 색상 느낌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매시즌 독특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던 것이 그이 장기였다.
<그림 2>는 비교적 장 폴 고티에 특유의 색이 잘 구현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고동색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확한 고동색은 아니다. 그가 선호했던 색상은 고동색에서 노란색과 오렌지 색의 기운에 살짝들어가 있는 듯한 것이었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는 색들은 모두가 그러한 이미지들을 어느 정도 함유하고 있다. 이런 전형적인 색의 인상들이 화려한 색이면 화려한 색, 원색이면 원색, 칙칙한 색이면 칙칙한 색, 어떠한 모습의 색이라고 하더라도 일정하게 구현된다. 그의 고동색은 마치 색의 영혼이라도 된 듯 수 많은 색들 속으로 유영하는 것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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