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통에서 오랫동안 바이어 생활을 했다고 관계로 일을 해결하려 하면 되겠습니까? 유통에 남아있는 후배들에게 부담만 될 뿐입니다. 유통 출신의 장점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닌 조직과 시스템으로, 관계가 아닌 정석과 정공법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회사와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안병림 이사는 지난 6월 22년간 일해온 유통 바이어의 자리를 떠나 보령메디앙스 패션영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이어에서 유통이 말하는 협력 업체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인디언 속담에 ‘남의 신을 신고 걸어보지 않고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마라’는 말도 있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좌우명으로 살아온 안 이사도 유통 바이어에서 협력 업체로 달라진 입장에 적응하기가 녹록치 않은 듯 했다.
안 이사는 현대백화점 바이어로 일해오면서 아웃도어와 스포츠, 아동복 부문을 중심으로 식품을 제외한 전 복종을 섭렵한 엘리트이다. 그러나 막상 말로만 듣고 눈으로만 봐 오던 협력 업체의 입장이 되니 유통과 업체간 입장의 골이 결코 낮지 않다는 것도 새삼 느끼게 된다고 실토.
최근에는 과거 바이어로 일했을 당시 만났던 협력 업체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고 했다. 특히 협력 업체 사람들로부터 들은 경쟁 유통사의 한 바이어 이야기는 지금도 안 이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한 바이어는 가능성 있는 협력 업체가 한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품의서를 올려서라도 수수료를 낮춰 업체를 배려하고 기다려 줬다고 합니다. 그 후 수혜를 받은 업체들은 자진해서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등 유통과 바이어에게 기꺼이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더군요.”
안 이사는 유통과 업체가 상충되는 입장에서 누가 먼저 배려하느냐가 문제일 뿐, 한발 물러서서 서로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자세는 똑같이 요구된다고 강조했다.
“유통에게 나중에 잘 하겠다고 말하면 유통은 여지없이 ‘지금 잘 하는 것을 보여 달라’고 말하죠. 저도 그랬으니까요. 미래에 대해 막연히 잘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보다는 현재 잘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브랜드가 어떠한 프로모션과 전략을 가지고 있으며, 월별 계획은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 이사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통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되 정석대로, 정공법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보편 타당한 가치에 기준해 서로의 신뢰 안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좋은 성과도 낼 수 있다는 것이 안 이사의 지론이다.
안 이사는 “개인적으로는 유통 출신도 업체에서 잘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이를 통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은 바람도 있다”고 덧붙였다.
장영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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