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구호물자 속에서 국내 란제리의 역사가 시작됐다면 침울한 이야기로 들릴까? 정확한 치수 없이 마구잡이로 입체 재단을 떠내던 시절 란제리 디자이너 세계에 입문, 한국인 체형에 맞는 란제리 패턴을 처음으로 만들었던 디자이너가 예신 디자인실에 있었다. 바로 김진희 부장이다.
1970년대 말 이너웨어 기업 비너스에 입사해 슬립 파트로 디자인을 시작한 김 부장은 선임자 없이 호된 기간을 보내야 했다. 마침 일본 와코루의 교육 지원이 시작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배울 기회를 가졌고, 1980년도에는 200명을 대상으로 한 국내 첫 국민 체위조사에 참여할 수 있어 한국인의 체형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너웨어 디자이너는 기술자 “캐주얼이 숯불에 빠르게 구워 먹는 등심이라면, 이너웨어는 하루 종일 끓이고 우려야 하는 곰국이죠.”
김 부장은 「마루이너웨어」 초창기 20개 매장으로 1년을 보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론칭 하자마자 매출이 급상승하는 이지 캐주얼 중심의 회사였던 만큼, 이너웨어의 제자리 걸음은 안팎으로 부담이 됐다.
이 같은 부담에 타 이너웨어 브랜드를 따라해 보기도 했고, 매출이 급성장하기도 했으나 영 캐주얼과 함께 주춤할 수 밖에 없는 경험을 했야 했다. 그때 생각한 것이 바로 ‘아이덴티티’이다.
“초반에는 회장님도 캐주얼 하듯 하지 못한다고 재촉하셨는데, 이 복종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꾸준히 시간을 쏟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죠. 처음에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하고 기다려 주시며 ‘이너웨어 디자이너는 기술자’라고까지 말씀하세요.”
김 부장은 이너웨어가 한 계단 한 계단 시간을 들여 올라가야 하지만, 한번 상승하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복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캐주얼이 1년 배워서 디자인에 투입시킬 수 있다면 이너웨어는 3년 정도는 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라며 “이너웨어를 마스터하면 사람의 체형을 정확히 알아 어떤 디자인도 문제 없다”고 덧붙였다.
잘 팔린다는 소리에 직원들과 함께 울기도 한 번은 외국에 디자인 샘플을 의뢰해 국내에서 자체 제작한 상품 출시를 며칠 앞둔 때였다. 이미 광고도 나갔고, 이제 출고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출고를 앞두고 견뢰도 테스트를 진행한 결과 기가 막혔다. 소재가 세탁 후 녹아 내리는 것이었다.
“광고는 나갔고, 상품은 출고돼야 하는데 정말 아찔했어요. 온 직원들이 백방으로 소재를 찾고 눈물에 눈물을 거듭하며 우여곡절 끝에 상품을 출고했어요.”
결과는 뜻밖이었다. 김 부장은 물론 직원들의 애를 태우던 상품은 출시 되자마자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고, 마네킹에 걸려있는 상품까지 벗겨 팔아야 할 정도였다. 리오더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상품이 출고될 때마다 직원들과 함께 울었어요. 매장 반응을 들을 때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거예요. 함께 고생한 직원들에게도 너무 고마운 마음이었어요.”
또 한번은 재단을 반대로 하는 사고가 있어 팬티가 거들로 만들어져 나온 때도 있었다. 계획에도 없는 거들이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직원들과 고민 끝에 이 상품을 생리 팬티로 홍보했고, 결국 이 상품은 완전 판매를 기록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죠. 그런데 그때마다 디자인실 식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겼어요. 어려울 때 함께 울고 웃었던 직원들이 가장 소중하게 느껴져요.”
‘김진희에게 배우면 다르다는 말’ 듣고 싶어 “김진희에게 배워서 역시 다르다는 말 듣는 것이 남은 제 꿈입니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 후배를 양성하는데 매진 해야죠.”
김 부장의 아침은 전날 매출 체크, 신제품 소진율 호가인, 영업과 MD 회의 등을 진행하느라 바쁘다. 개인별로 보고된 일지도 확인하고 디자인 선택부터 컬러, 시장정보 등을 직원과 공유하느라 하루 일과가 빠듯하다. 이런 그가 최근에는 후배 키우기에 열정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신입 사원에게 패턴부터 직접 만드는
장영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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