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서 색을 빼면 명도가 남는다. 하지만 사물에서 명도를 뺄 수는 없다. 그래서 명도는 색보다 우선이다. 많은 사람들은 색을 알려면 색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색을 마음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 색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근본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밝음과 어두움, 이는 비록 색 너머에 있는 색이긴 하지만 볼 수 없는 눈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다.
색깔과 명암
<그림 1>은 마곡사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천왕의 모습이다. 머리에 쓴 장식과 옷, 얼굴 등에 베풀어진 색들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귀로 들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마음을 좋게 만드는 것처럼 눈으로 들어오는 이런 형상들도 보는 기쁨을 한껏 가져다 준다. 만일 우리의 눈이 이런 색들을 볼 수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건조해졌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렇게 색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이다.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모든 생명이 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색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물에 따라서 색을 아예 보지 못하는 것이 적지 않다. 색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마곡사에 가더라도 <그림 2>처럼 색이 완전히 빠져버린 사천왕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컬러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찌 축복이 되지 않을까?
옷에서 물이 빠지듯이 사물에서 색이 빠지게 되면 남는 것은 회색의 명암이다. 명암의 세계에는 오직 묵직한 덩어리감만이 존재한다. 색이 휘발함으로 해서 화려한 색이 차지하던 자리에는 밝고 어두운 회색의 단계들이 들어서고 갖가지 색상들은 무채색 톤 하나로 통일되며, 튀어나오고 들어간 덩어리의 출입만을 지시하게 된다. 명암의 세계는 색의 세계보다는 형태의 세계와 많이 가까운 것 같다. 색을 보지 못하는 많은 생명체들은 화려한 색의 향연보다는 이런 덩어리감의 세계를 살고 있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처럼 전혀 딴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덩어리의 세계를 단지 컬러의 세계가 탈색된 결핍의 세계로 보아야 할까? 색이 휘발되고 남은 나머지로 취급해야 할까? 그래서 색을 보지 못하는 이땅의 모든 생명들을 자비의 눈으로 바라봐도 되는 것일까?
본질로의 회귀
재미있는 것은 색이 없어지고 명암이 남을 수는 있지만 명암이 없어지고 색만 남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이 없는 세계는 가능해도 명암이 없는 세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명암, 즉 흑백의 세상을 색의 결핍으로 보는 시각을 교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족일 수 있다. 색이 있든 없든 어둡고 밝은 명암이 변함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면 화려하게 눈을 파고들어오는 색이야말로 흑백의 세계에 빌붙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색을 보는 눈길도 약간은 수정해야 한다. 색의 세계가 있고, 명암의 세계가 따로 있다면 우선 눈에 들어오는 색보다는 그러한 색의 뿌리가 되는 명암을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모든 색채의 원리들은 색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색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색을 가지런하게 체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색의 위계가 반드시 자리잡아야 한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가려져서 일사불란하게 줄을 서야 하는 것이다. 색에 있어서 이러한 위계질서의 맨 위에 자리잡았던 것이 3원색, 즉 빨강, 파랑, 노랑이었다. 몬드리안과 같은 화가는 여기에 무채색의 맏형 격인 흰색과 검은색을 추가하여 가장 근본이 되는 색채라고 하면서 이 5가지 색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아시아에서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갔다. 3원색도 결국 색일 뿐인데 이러한 유채색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것을 무채색으로 보고 흰 종이에 검은색 먹으로만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동아시아에서는 채색화가 별로 발달하지 않고 수묵화만 그려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수묵화나 서예가 자리잡은 것은 후대의 일이고 고대로 올라갈수록 채색화가 주류를 이룬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구려 벽화나 고려 불화처럼 시대를 올라갈수록 더 화
최경원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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