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첨단’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을 듯한 세상이다. 온갖 기술이 넘쳐나고, 또 그 첨단 기술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시대다. 이제 생활 곳곳에 침투한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 없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트렌드’, 즉 유행이라는 말의 지배가 가장 강력한 분야인 패션 또도 이런 ‘첨단’의 바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패션은 의외로 첨단 기술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분야”라고 입을 모은다.
패션계에서 흔히 쓰는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란 말은 원래 ‘고급 재봉’을 뜻하며, 손으로 섬세하게 만든 옷을 높이 대접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패션 분야에서는 ‘수공예’가 대량 생산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닌다. 기성복보다는 맞춤 양복이 훨씬 비싸고, 기계가 놓은 것보다는 손으로 한땀 한땀 놓은 자수에 더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그럼에도 디지털 기술의 영향력은 패션계에 꾸준히 미치고 있다. 기술은 한때는 사람의 손으로밖에 할 수 없던 작업을 쉽게 해낼 수 있으며, 그것은 익히 알던 수공예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한다. 또한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런웨이 쇼에서도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실험적인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패션의 만남은 과연 어떤 양상일까.

◇ 수공예와는 또 다른 우연적 매력, 기술이 낳은 패턴의 세계
디지털 기술이 가장 친숙하게, 그리고 많이 반영되는 분야는 역시 패턴이다.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전부 사람의 손으로 진행되던 과거의 패턴 작업은 이제 첨단 디지털 기술의 산물로 발전하고 있다.
브랜드 ‘킨키(Keenkeee)’를 운영하는 김형기씨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패턴에 전문성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이다. 그는 2010년부터 2년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최적화기법을 사용한 이미지 생성 기법(김윤영 교수 주도, 류재춘 박사연구원과 함께 진행)’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 소유 특허이다. 기법은 컴퓨터가 열 전달 메커니즘을 기반으로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하도록 하는 것인데, 이미지를 모티브로 삼아 다양한 시각적 어플리케이션, 특히 섬유 프린팅에 쓰이도록 한다.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패턴 몇 가지를 선보인 김형기 디자이너는 “일반적으로 컴퓨터가 그려내는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패턴과는 달리 곡선이 많이 반영되고 전반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 이 기법의 장점”이라며 “프린트된 결과물이 작업자의 의도와 크고 작은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디지털 기술로서는 한계라 할 수 있지만, 매력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김형기 디자이너는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사진과 같은 해상도의 프린트를 옷감에 직접 할 수 있다.
꼭 특수한 기법을 쓰지 않아도 컴퓨터로 디자인한 프린트를 옷감에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번에 선보인 물(water)을 소재로 한 신작들도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뉴욕패션위크 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된 ‘컨셉코리아 2013 S/S’에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5인 중 한 명으로 참가한 손정완 디자이너도 특유의 화사한 컬러가 돋보이는 추상적인 패턴의 의상을 선보였다.
이에 비해 드물지만 의미있는 기법이 또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 즉 코딩을 통한 그래픽 이미지 생성 기법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김형기 디자이너에 따르면 프로그래밍 기반 비주얼 작업은 주로 3D 애니메이션, 영화 특수효과 분야에서 많이 쓰이며, 디지털 텍스타일 그래픽의 영역에 산업적으로 적용되지는 못하고 있다. 해외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Zara Atelj는 ‘The daily pattern by Zara Atelj’라는 작품에서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여기에서 보이는 패턴은 ‘매일의 뉴스 흐름’이라는 실제 정보를 수집해 시각화하고 그 배리에이션을 패브릭에 적용시킨 것으로, 우연적인 느낌이 살아 있어 독특함을 더한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고해상도 이미지를 업로드하면 이를 단순화시켜서 퀼팅(뜨개질) 패턴으로 제공해 주는 홈페이지(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홈페이지, http://www.vam.ac.uk/microsites/quilts/patc hwork)도 있다. 일반 네티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런 홈페이지는 첨단 기술의 산물을 전통적인 방법의 패턴으로 변환해 주는 흥미로운 장치인데, 이러한 변환에도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다는 점이 재미있다.

◇‘실험’ 통해 런웨이 선 디지털 기술
패턴을 제외해도 패션과 디지털 기술이 만난 사례는 다양하다. 디자이너들에게 매우 중요한 이벤트인 패션쇼에서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이 광범위하게 있었다. 이런 사례에서 키프로스 출신의 영국 디자이너인 후세인 샬라얀을 빼놓을 수는 없다.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않았으나 다채로운 실험으로 단순한 패션 디자이너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갖고 있는 후세인 샬라얀은 옷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가능하게 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모델이 테이블 보를 걸치면 스커트로 변모하고, 의자 덮개를 걸치면 곧바로 드레스가 되는 ‘After words(2000년 F/W)’ 등이 유명하다.
2005년 F/W 컬렉션으로 선보인 ‘Genometrics’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런던에 사는 사람들의 DNA가 소리의 파노라마(soun dscape)에 어떻게 연속적으로 반응하는지를 표현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런던에 사는 익명의 여성들이 제공한 옷에서 DNA를 추출하고, 이것이 런던의 여러 가지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그래프 지도를 제작한 뒤 이를 바탕으로 컬렉션을 디자인했다. 또 2007년 S/S 컬렉션 ‘Airborn e’에서는 수많은 LED 조명과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디스플레이를 조합해 만든 LED 드레스를 선보였으며, 2008년 S/S 컬렉션 ‘Readings’에선 이보다 더 도발적인 레이저 드레스를 런웨이에 올렸다. 붉은 레이저 광선이 모터에 의해 움직이는 이 드레스는 첨단 기술이 활용된 조명과 패션의 신기한 조합으로 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상봉 디자이너 또한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13 S/S 컬렉션에서 LED 조명이 들어간 우산을 비중 있는 액세서리로 선보였다. ‘봄비’를 소재로 한 이번 컬렉션 무대에서 은은한 빛을 발한 우산은 모델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어우러져 산뜻하게 연출됐다. 조명보다도 더욱 신기한 기술로는 3D 홀로그램이 있다.
3D 홀로그램은 다양한 패션쇼 무대에서 활용됐는데, 2006년 F/W 컬렉션에서 영국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은 홀로그램을 이용해 모델 케이트 모스를 형상화한 피날레를 선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2008년에는 패션 브랜드 디젤이 ‘액체 공간(liquid space)’이라는 주제로 런웨이 전체에 3D 홀로그램이 오가는 가운데 모델이 걸어다니도록 하는 시도를 했다. 주제와 잘 어울리는 홀로그램이 탄성을 자아내는 런웨이를 연출해, 지금까지도 패션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쇼가 되었다.
이예은(OSEN 스타일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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