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때 파리 프레타포르테 도전
첫 참가한 파리 포레타포르테 전시회의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처녀 출전에서 따낸 계약은 이상봉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독일과 뉴욕에서 열리는 전시회에도 잇따라 참가해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각인시켜 나갔다. “세계적 디자이너들과 당당히 맞서려면 우선 파리 무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하지요. 그 첫 단추가 프레타포르테 전시회와 파리 컬렉션에서 전세계 바이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해외 전시회에서 내공을 쌓은 후 컬렉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야만 글로벌 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릴 수 있습니다.”
해외 패션 전시회는 외국 바이어와 직접 만나 브랜드력을 키울 수 있는 생생한 비즈니스의 현장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상봉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어렵고 힘들더라도 해외 전시회에 직접 나가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힘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파리를 매료시킨 ‘한글 패션’
파리 컬렉션 무대를 주름잡던 이상봉은 2006년 파격적인 ‘한글 패션’을 선보여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둥근 뿔테 안경과 덥수룩한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이지만 여기에 하나 더, 한글을 빼놓고 그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글은 이제 그의 패션 인생에서 커다란 ‘꽃’으로 활짝 피었다.
파리 컬렉션에서 한글 모티브의 작품을 선보였을 때 현지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뜨거웠다. 파리 일간지인 르 파리지앵 1면에 한글이 프린트된 옷이 실렸고, 현지 유명 방송 매체와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이상봉은 파리 컬렉션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한글, 달빛 위로 걷다’라는 타이틀로 한글 패션 전시회를 열었다. 국내에서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이를 반증하듯 그 해 가을 파리 후즈넥스트와 프리미에르 클라스 전시회에서 45명의 유럽 디자이너들이 직접 한글이 프린트된 원단으로 만든 작품을 전시하는 프로젝트 쇼가 열릴 정도로 대단한 이슈를 끌었다.
이상봉은 30년 디자이너 인생 중 이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한글뿐 아니라 미인도∙산수화∙조각보 등 전통적인 우리 고유의 것을 이상봉식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분야로 디자인 영역 확장
이상봉은 우리를 둘러싼 삶이 곧 디자인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의류∙구두∙가방뿐만 아니라 컴퓨터∙자동차∙건물까지 디자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는 것.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생활 속으로 파고든 이상봉만의 디자인 세계는 LG전자 샤인폰에 이어 금호 리첸시아 아파트, 이마트의 침구류, 행남자기의 도자기, 프랭클린 다이어리, 경주용 자동차 A1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로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커피잔이나 휴대폰∙가구 등이 패션의 한 영역이라는 판단에서다. 그는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더 나아가 감성의 시대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만큼, 감성을 두드릴 수 있는 모든 디자인을 패션으로 부를 수 있다고 잘라 말한다.
뮤지컬 선덕여왕 의상 제작
이상봉은 요즘 또 한번의 스포트 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 1월 5일부터 초연 중인 뮤지컬 선덕여왕의 모든 의상을 직접 제작, 신라 천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과거와 현재∙미래를 넘나드는 이상봉식 패션 세계를 유감없이 펼쳐 보이며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을 ‘우리 것’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다. 너무 가까이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내다 보면 마치 공기처럼 그 아름다움을 간과하기 쉽다. 선덕여왕 뮤지컬을 통해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 시대의 웅장함과 화려한 왕실 문화를 현대에 다시금 음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었다. 대장금을 비롯한 우리 드라마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고 있지만, 단순히 배우에만 의존하는 한류가 아니라 생활 속 디자인을 통해 한국 전통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편타당한 창조적 문화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혼신을 다했다.”
새해 들어서도 이상봉은 디자인 콜래보레이션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1월 18일(오늘)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현대자동차 소나타와 함께 패션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을 시작으로 디자이너 데뷔 30주년을 맞는 2010년을 이상봉의 해로 만들기 위해 새해 벽두부터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쿠웨이트에 해외 첫 단독매장 오픈
이상봉은 새해 또 하나의 야심찬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세계적인 명픔 브랜드들이 들어선 쿠웨이트의 대형 쇼핑몰에 이상봉의 해외 단독 매장 1호점을 오픈하는 것. 이 부틱숍은 인테리어 공사가 마무리 되는 이달 말쯤 정식 오픈을 앞두고 있다.
쿠웨이트는 이상봉이 13년전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첫 진출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옷을 수출해온 곳이다. 현지 바이어의 끈질긴 요청으로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쿠웨이트의 가장 큰 쇼핑몰에 「이상봉」 브랜드로 단독 매장을 여는 소감을 묻자 “단독 매장을 열게 되면 쿠웨이트에서 그동안 이상봉 옷을 판매하던 멀티숍을 포기해야 하는 리스크가 따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해외 첫 단독 매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면서 “중동의 부호들을 더 많이, 직접 공략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디자이너 데뷔 30주년 아트북 출간
올해 6월쯤 이상봉은 그간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의미에서 디자이너 데뷔 30주년 기념 아트북 출간을 준비 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3월에는 파리 컬렉션에 참가하고, 4월에는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모스크바 패션쇼 등이 예정돼 있는 등 연초부터 숨돌릴 여유조차 없을 정도의 강행군을 펼치고 있다.
“내 나이는 언제나 37세. 37세 때 나는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안 되겠다 싶어 디자이너 작업을 계속하는 한 언제나 37세에 머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3과 7을 더한 수의 끝자리인 ‘0(제로)’가 의미하는 무(無)와 공(空)의 상태를 좋아한다. 사물이 생성되면서 동시에 소멸되는 제로라는 지점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제로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비어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가 자주 얘기하는 ‘나를 항상 비워라’는 명제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제는 그 동안 받은 사랑을 사회와 고객에게 돌려주는 일에 열정을 쏟고 싶다. 지난 30년이 내 욕심으로 살아온 세월이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남을 위해 사는 가치 있는 인생으로 풍성하게 만들고 싶다.”
김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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