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바지의 대명사’ 김종석 前 잠뱅이 사장이 지난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52세. 유족으로 부인 안재영 씨와 2남이 있다.
「잠뱅이」는 한때 7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연간 200만장의 청바지를 판매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김종석 사장의 숙환으로 「잠뱅이」의 영업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2005년 현재 80여 개 대리점에서 5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고인이 만든 청바지 브랜드 「잠뱅이」는 1990년대 중반 신중저가 캐주얼을 여는 새로운 시대정신의 신호탄이었으며 ‘진’의 또 다른 한국식 이름이 되었다.
“청바지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자기 원칙을 지켰다. ‘한국의 리바이스’를 만들겠다는 고집이 있었기에 ‘잠뱅이 신화’를 이룰 수 있었다. 고인은 한국 캐주얼 시장의 신화적 존재이며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박상돈·예신퍼슨스 회장>
“20년을 한결같이 거래했다. 동대문에서 장사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본인의 이익보다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본인의 사업을 통해 거래처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셨다. 남들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는 분이었다.”
<박문호·경남통상 사장>
“항상 대리점주와 고객들을 생각하신 분이었다.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늘 대리점주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으셨다. 사업 초기 매장 안에 재봉틀을 두고 바지 밑단을 즉석에서 줄여준 것도 김 사장님의 생각이었다.”
<공현식·「잠뱅이」 통영점 사장>
“김종석 사장은 1990년대 중반 캐주얼 시장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좋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팔겠다는 김종석 사장의 기업가 정신이 있었기에 1990년대 후반 신중저가 시장이 태동하고 2000년대 베이직캐주얼 전성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황상윤·패션인사이트 발행인>
지난 17일 타계한 김종석 잠뱅이 사장을 기리는 패션인들의 말이다. 청계천 미싱 시다에서 출발한 김 사장은 청바지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좋은 제품을 대중들에게 팔겠다는 기업가 정신을 통해 ‘잠뱅이 성공’을 일궈 냈다.
김종석 사장은 1990년대 중반 캐주얼 시장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값비싼 외국 청바지 브랜드가 판을 쳤지만 그는 「잠뱅이」란 고유 브랜드를 고집했다.
젊은 친구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브랜드명이 필요하다는 주위 권유도 적지 않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입어서 이쁘고 부담없이 살 수 있으면 됐지 이름이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김종석 사장은 나보다는 남을 위한 배려가 누구보다도 앞섰다. 독실한 종교인이었던 고인은 사업 초창기부터 성당에 매년 1만 벌 이상의 옷을 기증했다. 옷 장사에서 재고는 큰 자산이었지만 이를 아끼지 않았다. 고인은 평소, “남들에게 베풀 수 있도록 나에게 복을 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말할 만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다.
외환위기를 맞아 회사의 자금사정이 좋지 않을 때 직원들이 어음 발행을 권유하자, “다같이 살아야지 나만 살겠다고 내 편한 것을 취하면 되겠느냐”고 말하며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잠뱅이」와 거래하는 업체는 50여 개사에 이른다. 대다수 업체들이 10년 이상 거래한 업체들이며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기 때문에 인연을 끊지 않는다고 한다.
전국에 「잠뱅이」 간판을 달고 있는 매장도 80여 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부분의 점주는 10년 이상 김종석 사장과 인연을 맺었다. “「잠뱅이」 대리점 7∼8년 해서 10억 이상 못 번 사람 없다”고 말할 만큼 적지 않은 수익을 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뢰와 정으로 맺어진 인연이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대리점주들의 말이다.
40년 전 남대문 봉제공으로 시작된 김종석 사장의 청바지에 대한 열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만들어냈다. 더욱이 그는 사업을 통해 취한 이익을 이웃에 베풀고 사회에 환원하는 등 나눔의 철학을 실천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 김종석 사장은
김종석 사장은 15세 나이에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했다. 처음 직장을 잡은 곳은 하루 14시간의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남대문 봉제공장이었다.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던 김 사장은 1977년 동평화시장 옥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삼형사’란 봉제공장을 차리게 된다. 삼형사는 1970년대 후반 당시 봉제산업의 호황을 맞아 순탄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때 김 사장은 겨울철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무거운 청바지를 짊어지고 가다
정인기 기자
ingi@f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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