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그의 소년 시절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소상인으로서 부지런히 열심히 일했다. 가족의 윤택한 생활을 위해 묵묵히 힘썼다. 청년 시절에는 용감하게 세상을 떠돌며 경험을 쌓았고 강한 의지로 신발 사업을 발전시켰다. 목숨 걸고 부딪치면서 드디어 소원을 이뤄 자신의 가죽 신발 브랜드를 론칭했다.
지금의 그는 뒤떨어지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한다. 여전히 업계 시장 발전을 분석하여 기회를 잡아 새로운 발전을 계획한다. 아웃도어 브랜드를 건설하여 기업을 인솔하여 새 시대에 진입하게 했다. 그가 바로 무린썬의 CEO 린룽저우다.
가난한 집 아이 일찍 집안을 떠맡다
린중저우는 60년대에 치앤저우스스(泉州石狮)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의 아이로 일찍이 집안을 떠맡았다. 그 해 겨우 14살의 그는 동년배와는 다르게 조숙하였고 영리하였다. 전형적인 60년대생처럼 그는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생산대의 노동에 참가하여 무엇이 노동인지 알게 되었다. 생산대의 오이, 토마토, 수박 등을 훔쳤고, 생 옥수수쌀, 생 가지 등을 먹었고, 돼지꼬리채와 고구마잎을 먹었고, 소를 방목하였고, 수업에 결석하였으며 투기로 폭리를 취하는 많은 일들도 했다.
1973년, 겨우 십 여 살이던 그는 자주 자기 키 높이에 맞지 않은 자전거를 타고 부두에 가서 물고기를 구매했다. 비를 만나면, 그는 자기 몸에 걸쳤던, 새것이라 할 수 없는 외투를 벗어 자전거 의자 밑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집에 있는 많지 않은 새 옷이었는데 비를 맞거나 어지럽혀지면 손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작은 어촌의 부두에서, 그는 자전거를 한 편에 세워놓고 바쁜 사람들 속에서 이쪽 저쪽으로 뛰어다니면서 만져보고 손짐작하여 두 시간을 바쁘게 보낸 후에야 겨우 한 광주리의 물고기를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시절에는 이것이 모두 공공 단체의 재산이어서 장사는 모두 투기에 속했지만 생활을 위해 일부 출항하여 생선을 잡은 어선들이 부두에 들어온 후 몰래 일부의 물고기를 팔았고 우리들은 몰래 산 다음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장사를 몰래 하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장사는 모두 이런 식이어서 많은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몇 푼의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탤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아니면 우리집 가족 다섯 식구의 생활이 더욱 쉽지 않았다.”
린룽저우는 그때를 회상하며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천천히 시장 체제의 변화에 따라 린룽저우는 정당하게 소상인을 할 수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물고기를 도매했고, 실어다 팔았다. 하루 중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뺀 십 여 시간은 바쁜 중에 강물처럼 흘러갔다. 장사는 점점 규모가 커져 매일 운영하는 수량은 점차 증가했다. 문제도 같이 따랐다. 겨울에는 괜찮았지만 여름만 되면 물고기는 특별히 빨리 상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린룽저우는 얼음 공장을 열었으며 전문적으로 냉동하여 신선도를 유지했다.
이렇게 해서, 린룽저우는 어시장에서 10년 가까이 바쁘게 보냈고 수입도 적지 않았다. 그때에 그는 치앤저우의 동일 업종 중 비교적 유명한 어업상의 하나였다. 운영 자금도 해마다 안정적으로 상승했다. 그가 24살 되던 해, 부친이 일대 결정을 내려, 가족 신발업 왕국의 큰 문호를 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업 발전의 궤도를 변화시켰다.
몇 번의 창업에도 웅대한 뜻이 다하지 않다
20세기 80년대 초, 스스(石狮)에는 개인 창업의 붐이 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린룽저우의 큰아버지는 국영 신발공장에서 기술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해 마침 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린룽저우의 부친은 “훌륭한 기술을 대대로 전수하여 아이들이 모두 좋은 날을 보내게 해야 한다”며 형님과 상의 했다.
비록 공장을 설립하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공장 설립에 어떤 물건을 구입하고 신발을 만들려면 어떤 공구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그들 부자는 아무 것도 몰랐다. 공장을 설립하기 위한 빠른 방법으로 파산한 한 공장을 찾아 완전한 세트의 설비들을 모두 인수하였다. 멀지 않아, 그들 부자는 겨우 4개월을 운영하고 처분하려는 신발 공장을 인수하였다.
좋은 기회와 지리적 우세 그리고 사람이 모두 준비된 상황에서 그들 부자는 발전할 수 있는 이 기회를 잡으려고 결정했다. 부친의 이런 결정으로 린룽저우는 정식으로 경제 발전 조류에 뛰어든 일원이 되었다.
일련의 계획과 기획 준비를 통하여 여행 기념 본 공장인 현 푸궈이냐오(富贵鸟)그룹이 정식으로 생산에 들어갔다.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3년 남짓 지났을 무렵, 공장은 재통합을 시작했을 뿐 아니라 “푸궈이냐오(富贵鸟)”라는 상표를 등록하였다. 이 시기에 린룽저우도 점차 이 무대에서 사라져 자기의 신천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88년 스스는 국무원을 거쳐 도시 건설을 비준하였다. 이 발전 기회를 정확히 본 린룽저우는 발전 방향을 건설 재료 시장에로 돌렸다. 어업 도매, 판매에서 신발 설계 생산에 이르러 다시 건설 재료 경영까지, 직업이 다르면 산을 사이에 둔 것과 같다고 하지만 몇 개의 서로 연관성이 없는 업종에서 린룽저우는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사업을 운영했다.
몇 년 동안, 린룽저우는 비록 큰 발전을 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평탄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건설 재료 사업 경영도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중에는 여전히 신발 업계에 뿌리를 내리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린룽저우는 줄곧 확고하게 자기에게 속한 브랜드의 창업이라는 길을 따라 나아갔다.
1991년에 이르러서야, 린룽저우는 자신이 진정한 창업을 했다고 칭했다. 30~40 명의 직원, 몇 개의 사무 책상, 주로 가죽신을 가공 생산하면서 그는 자기에게 속한 창업의 역사를 시작했다.
창업의 길은 어려웠다. 자수성가한 기업인들이 평탄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 공장을 설립하고 얼마 되지 않아, 린룽저우는 모든 정력과 열정을 사업에 쏟았다. 한 몸으로 여러 직무를 보았는데, 한편으로 회계를 보면서 심사숙고 결정하였고 한편으로 디자인을 하면서 한편으로 상품 배달을 했다.
그때를 린룽저우는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창업하여 신발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됐을 때 공장은 작은 작업실 정도였고, 추가로 사들인 몇 대의 구식 재봉틀을 생산에 투입하였으며 2~3개의 작은 주문을 받아도 아주 기뻐하였다.
하루에 최소 열 몇 시간을 일했지만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린룽저우와 함께 지금까지 일한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며 오직 두 글자 ‘성실’을 말한다. 성실함은 그가 고객으로부터 신임을 얻게 하였으며 오늘과 같은 시장을 개척하게 하였다.
굳은 결심으로 명품을 만들다
90년대에 이르러, 스스의 신발업과 의류업은 중국 상업계의 얕볼 수 없는 파워를 가지게 되어 대대적으로 발전하였다. 이전의 개인경영 공장도 모두 브랜드 발전기에 진입했음을 인식했다. 이 시기의 린룽저우도 더욱 깊은 발전을 탐구해야 함을 인식하였다.
시작하고 얼마 후, 가죽 신발 상품은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추세였으나 1998년, 시장경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린룽저우는 “당시 스스의 기업의 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저지양(浙江)기업은 이미 규모를 갖춰, 생산량뿐만 아니라 원가도 비교적 낮아 경쟁면에서 우리는 이미 어떤 우세도 없었다.”라고 소개했다.
1988년에 린룽저우, 린찌앤캉, 린위앤 세사람은 협력하여 푸썽(福盛)신발업유한공사를 설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린썬(木林森)」이라는 상표를 신청하였다. 이 이름은 부친이 채택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첫째, 새와 삼림은 분리될 수 없다. 그는 林가문의 형제와 기업이 새와 삼림처럼 사이 좋게 지내면서 건강하게 발전하길 희망했다; 둘째, 브랜드 중 “林”자는 林氏 가족 사업의 연속을 대표했다; 셋째, 하나의 나무는 기둥이고, 두 개의 나무는 숲이고, 세 개의 나무는 삼림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치를 설명한다: 사업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며, 사람도 역시 착실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업을 강대하게 할 수 있다.
“기업을 차리는 것은 자기의 인생에 ‘무기형’을 내리는 것과 같고,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한 것과 같다. 진입만 가능하고 후퇴는 불가능하여 열심히 해야만 한다.” 린룽저우의 신발 공장의 최초 일일 생산량은 100여 켤레밖에 안 됐다. 창업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 그는 일찍이 세상을 떠돌며 온몸으로 경험했던 ‘재능’이 있었다. 몇 년 동안 기업생산 규모는 끊임없이 확대되어 회사의 직원들도 1200명으로 늘었으며 그 중에는 30 여명의 고급 설계사와 20여명의 베테랑 관리 인원도 포함되어 있다.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린룽저우는 기업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시작하였다. 아주 빨리 그는 브랜드의 위치를 확립했다 – ‘자연 캐주얼, 조화, 성공, 신분, 혈육 간의 정, 건강’의 이념을 선도하여 상품에 유입시켰다. 이런 이념은 기업으로 하여 마켓 셰어(market share)에서 우세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과 자연을 향한 소비이념과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최근 몇 년, 아웃도어 시장은 아주 왕성하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아웃도어 브랜드는 전문성이 없이 캐주얼에 치우쳐 종합적인 아웃도어 의류는 여전히 시장에서 공백이었다. 이런 배경과 기회에, 무린썬(木林森) 아웃도어 상품은 시장의 선두주자가 되기 위해 힘껏 노력하여, 중국 첫 번째 아웃도어 캐주얼 브랜드를 만들었다. 삼림이 바로 무린썬의 토템 조직이다. 상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업 문화, 경영 사유 맥락 모두 ‘삼림’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무린썬과 바냐우(霸岛)는 강자와 강자의 협력으로 손을 잡고 제조하여, 무린썬 아웃도어 브랜드는 생활을 뜨겁게 사랑함을 제창하였고, 자연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건강 캐주얼 아웃도어 ‘삼림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제창하였다. 삼림·태양빛·유행 등 설계 언어는 품위 있고 환경 보호를 중시하며 품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아웃도어 브랜드를 창조해냈다.
날로 커져가는 야외 활동 애호가들에게 우수한 품질의 장비를 제공하였다. 2010년, 무린썬 아웃도어는 5000만 위안을 투입하여 시장을 개척하였으며 그 외 1억 위안을 투입하여 시장을 확장하여 200개 클라이언트 네트 건설을 완료했다.
무린썬 브랜드가 탄생한 지 얼마 안 돼, 무린썬 아웃도어 브랜드는 적극적으로 국제 시장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준정부 기관 성격의 권위 기구인 미국 아웃도어협회에 가입하였다. 이 외력을 빌려 무린썬 아웃도어는 빠르게 자신의 실제 가치를 높여 국제 거대 브랜드와 나란히 경쟁하면서 국제 시장의 진입을 알렸다.
2010년, 국가의 권위 있는 자산평가회사가 이 브랜드에 내린 가치 평가는 56.8억 위안에 달했다. 이는 다시 한번 시장이 격렬한 경쟁시대에 진입해 상품 동질화 추세가 날이 갈수록 뚜렷한 이 시대에 린룽저우의 경영이념은 이미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증명했다.
왕술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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