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테일 시대 핵심 콘텐츠? ‘성공하는 홀세일 브랜드’
2018-06-01이채연 기자 leecy@fi.co.kr
디스트리뷰터, 리테일러 요구 맞춰 글로벌 브랜드 성장

글로벌 마케팅과 세일즈. 현지 소싱 인프라 관건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내 최대 리테일러인 ‘i.t’. 홍콩과 중국 대륙 내 i.t 매장에는 몇 년 전부터 ‘로켓런치’‘푸시버튼’‘스타일난다’ 등 한국 패션 브랜드가 메인 섹션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참스’‘샐러드볼’‘앤더슨벨’‘커버낫’‘OIOI’‘카이’ 등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i.t는 여러 채널을 통해 한국 브랜드를 수주 사입하고 있으며, 최근 그 숫자와 비중 모두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안정우 에비나 대표는 “‘참스’‘앤더슨벨’‘커버낫’ 등 10여 개 매출 상위 브랜드들은 회당 수주액이 1억5000~2억5000만원”이라면서 “수주 비즈니스는 초기 볼륨이 작아 보이지만 리테일러의 포지션과 수주성향에 맞는 브랜드가 매칭돼 검증을 거치면 지속성장이 가능한 비즈니스”라고 설명한다.

세일즈랩 에비나는 i.t의 홍콩 13개 매장, 인도네시아 타임인터내셔널, 중국 VIP.com 등 7개국 리테일러와 파트너십을 맺고 한국 패션 브랜드를 연결하고 있다. 현재 홍콩 i.t를 대상으로 연간 정규 4~5회 수주회를 진행하고 있다. 


'앤더슨벨'과 '아더에러X메종키츠네'


신진 디자이너의 스몰 브랜드가 국내에서는 흔한 백화점 매장 하나 내기 어렵지만 글로벌 유통 플랫폼 IT를 상대로는 성과를 내는 비결은 분명하다. 유능한 세일즈랩의 역할과 더불어 그들이 가진 경쟁력 △명확한 아이덴티티 △유니크&트렌디한 디자인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 △공급경쟁력 등 4개 키워드가 리테일러의 니즈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브랜드는 고비용 유통구조의 한국 패션시장에서 홀세일 비즈니스의 물꼬를 트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내 시장에서도 삼성물산 ‘비이커’, 인디에프의 ‘바인드’ 등은 이미 이들 브랜드의 빅 바이어가 됐다.


최근에는 ‘원더플레이스’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사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다. 규모에 상관 없이 참신한 콘텐츠로 무장한 홀세일러와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따르는 리테일러의 결합이 국내 유통시장의 판도까지 바꾸는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무신사’로 대변되는 국내 온라인 B2C 플랫폼도 이들 브랜드가 홀세일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 온라인 패션몰을 통해 전문 아이템으로 승부를 낼 수 있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예전에는 백화점 내에 멋진 매장을 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토털 아이템을 전개해야만 ‘브랜드’라고 인정해주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을 주 쇼핑 채널로 활용하는 동시대 소비자에게는 ‘파워아이템’이 곧 ‘브랜드’로 각인된다.


실제 ‘앤더슨벨’‘OIOI’ ‘LMC’‘디스이즈네버댓’ ‘스테레오바이널즈’ 등 온라인 마켓서 성장한 브랜드들은 채널을 넘어 성장하고 있다. 또 미국, 중국의 유수 백화점과 편집숍 바이어들의 러브콜이 이어져 글로벌 경쟁력을 입증할 기회도 맞았다. 온라인 플랫폼이 브랜드에게는 인큐베이터로, 바이어에게는 검증 장치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다만 대다수가 오너이자 디렉터를 겸하는 스몰 브랜드들이 주의해야 할 일이 있다. 국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B2C로 매출을 키우려다 보면 공급가와 판매가의 갭을 줄여서라도 가격경쟁력을 높이게 되고 적정 마진을 가져가기 어렵다. 결국 B2B에 나서서는 이미 낮출 대로 낮춘 배수율 때문에 바이어가 이익을 낼 수 있는 원가구조를 만들 수 없다. B2C 플랫폼으로 브랜딩을 하고, B2B로 볼륨을 키우는 균형잡힌 비즈니스 모델을 세워두어야 한다.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최근 홀세일 비즈니스로 성과를 내고 있는 브랜드들은 아이덴티티가 명확한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와 스트리트캐주얼이 주를 이룬다.

편집숍 ‘비이커’의 강민주 CD는 “‘렉토’‘아더에러’‘스테레오바이널즈’ 등 ‘비이커’ 플래그십스토어에서 매출 상위권에 있는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확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그래픽이나 컬러, 디테일 등으로 아이템 하나하나에 드러낸다는 것”이라면서 “이들 브랜드는 소비자들에게 젊음과 자유, 업그레이드된 서브 컬쳐를 대변하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말했다. 특히 작품 수준의 퀄리티를 가진 시즌 화보로 모바일 쇼핑이 일상화된 디지털 세대를 매료시켰다는 설명이다.

‘아더에러’ ‘앤더슨벨’이 시즌 당 20개 안팎에 불과한 모델 수, 무점포 영업과 홀세일로도 연매출 100~200억대를 낼 수 있는 배경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비주얼과 스타일링’이라는 브랜딩 전략으로 약점을 극복한 때문이다. 이들은 상품기획-생산-판매-재고관리를 모두 감당함으로써 고비용, 고위험에 노출되는 공급자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을 버렸다. 스스로는 콘텐츠 생산에 집중하고 판매는 리테일러에게 맡기는 비즈니스 모델, ‘소비자가 원하는 아이템’에 집중한 결과다.

명확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한 패션 브랜드는 리테일러만이 아니라 자본시장에게도 매력적으로 어필한다. LVMH그룹 계열 투자사로부터 600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젠틀몬스터’, 로레알그룹에 지분을 6000억대에 매각한 난다(3CE, 스타일난다)는 이견이 없는 대표 주자들이다. 이들 브랜드의 행보는 높은 지분가치만이 아니라 패션산업이 자본, 테크놀러지와 결합해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줘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유니크 & 트렌디한 디자인
해외 럭셔리 브랜드 타이틀이 장악해 온 아이웨어 시장에서 ‘젠틀몬스터’가 단번에 ‘명품’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히트한 한류 드라마에 제품을 노출시킨 PPL이 확산의 1등 공신이기는 하지만 배우 전지현이 무명 브랜드의 제품을 착용하기로 결정하게 된 동기는 디자인의 특별함이다. 까탈스러운 국내 소비자들의 성향도 디자이너들이 유니크한 디자인에 더 집중하도록 만든 채찍질이 됐을 것이다.

국내 패션 수주회를 방문하는 해외 바이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K-패션의 경쟁력 역시 ‘유니크한 디자인이 주는 새로움’이다.
2015년부터 서울패션위크 참가 브랜드 심사에 참여한 에릭 제닝스 삭스피프스에비뉴 부사장은 한국적 디자인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시도, 여기에 트렌드를 반영하는 속도감을 K-패션의 최고 경쟁력으로 꼽은 바 있다.

최근에는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허무는 ‘아티스틱 디자인’을 K-패션의 디자인 경쟁력으로 추가할 만 하다. 화려한 색감의 텍스타일 디자인이 시그니처인 ‘그리디어스’의 경우 파리 ‘트라노이’, 뉴욕 ‘에디트’ 등 해외 트레이드쇼에서 호평을 받아 현재 미국, 이탈리아, 중국, 싱가포르 등에 컬렉션을 수출하고 있고 올해 산업부 지원 ‘월드 스타 디자이너’로 선정돼 지난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컬렉션을 선보였다.

회화 작품을 모티브로 한 업사이클링 브랜드 ‘얼킨’도 인디브랜드페어, 서울패션위크에서 성장가능성을 인정받아 지난해부터 밀라노 ‘화이트’ 트레이드쇼 참가, ‘스타일 스튜디오 상하이’ 팝업스토어 등 정부지원 글로벌 마케팅 프로그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웍스아웃’에서 열렸던 ‘디스이즈네버댓’ 프레젠테이션 모습


소비자가 공감하는 진정성 있는 스토리텔링
‘디스이즈네버댓’은 브랜드 스토리 메이킹의 신세대 기린아다. ‘디스이즈네버댓’의 열성적 마니아들은 마포구 상수동 ‘무대륙’, 서교동 서교동 ‘29CM’사옥, 압구정동 편집매장 ‘웍스아웃’에서 열렸던 ‘디스이즈네버댓’의 프레젠테이션을 어김 없이 가득 채우고 문 밖까지 긴 행렬을 만들었다. 패션 브랜드의 프레젠테이션은 보통 바이어, 유통사 관계자나 미디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하기 마련이지만 ‘디스이즈네버댓’ 프레젠테이션에는 충성고객이 훨씬 많이 몰린다. 행사장에서는 콘셉트나 제품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도 없고, 판매도 하지 않는다. 제품 자체, 공간 구성을 통해 그저 넥스트 시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는데, 마니아들은 새로운 컬렉션을 보아두었다가 판매를 시작할 때까지 기꺼이 기다리겠다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린다.

이에 대해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디스이즈네버댓’은 엇비슷한 브랜드가 난립하는 동시대 패션 시장에서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 패션브랜드의 존립 이유이자 목표라는 점을 잘 알고 제대로 구현도 한 것”이라면서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니라 단단한 결속력과 완벽한 협업 체계를 구축한 ‘팀’ 작업을 통해 옷, 비주얼, 영상을 이야기하듯 풀어내 고유의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분석했다.

요즘 소비자들은 소재와 봉제 품질, 대중매체를 통한 화려한 광고로 브랜드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다. 최근 화제를 모아 브랜드의 제2 전성기를 이끌어 낸 ‘휠라’의 화려한 부활에는 소비자들이 공감한 스토리텔링이 적지않은 몫을 했다.

‘휠라’는 2016년 리뉴얼을 단행하면서 스포츠 브랜드 임에도 기능성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트렌드, 밀레니얼 세대의 스트리트 패션에 포커스를 맞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100년 전통의 브랜드 오리진을 바탕으로 해외 유명 디자이너 또는 타 산업군과의 협업으로 만든 ‘휠라’만의 스토리, 이는 레트로 트렌드라는 순풍을 만나 전성기를 뛰어넘은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온라인 기반 브랜드들이 펴는 오프라인 유통 전략, 특히 플래그십스토어 역시 브랜드 스토리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툴이다. ‘스타일난다’의 ‘핑크호텔’, ‘임블리’의 ‘블리네’ 등은 서울 명동과 홍대 입구 등 트렌드 발신지에 자리한 위치선정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타깃 소비자의 취향과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 모델에 맞춰 매장이 아닌 ‘놀이터’와 같은 공간을 만들었다.


바이어 이익 보장하는 공급경쟁력
서울패션위크를 찾았던 타카히로 이즈미 ‘10꼬르소꼬모’ 상하이 바잉 매니저는 “중국에서 판매할 한국 디자이너 컬렉션을 찾을 때 두가지에 초점을 맞추는데 첫 번째가 가격, 그 다음이 쿨하고 나이스하고 스페셜한 디자인”이라고 단언했다. 바이어 입장에서 브랜드의 공급경쟁력은 하이엔드 시장을 제외한 전 영역에서 홀세일 비즈니스의 성패를 가르는 잣대라는 이야기다. 바이어가 유통과 물류 비용을 제하고 이익을 볼 수 있는 가격 구조여야 비로소 상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공급경쟁력 면에서도 ‘휠라’의 사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휠라’는 리뉴얼과 함께 국내 영업 노선 자체를 수정했다. ‘원 브랜드 원 숍’이라는 익숙한 방식 대신 슈즈 멀티숍을 통한 홀세일로 채널을 다각화함으로써 재고부담은 줄이고 가격경쟁력을 높였다.
메가 히트를 기록한 ‘코트디럭스’와 ‘디스럽터2’, 두 제품의 경우 기존 제품보다 국내 판매가(69,000원)는 낮지만 마진은 더 좋다.

‘휠라’는 두 제품을 중국 푸젠(福建)성 진장(晋江)에 있는 직영 신발소싱센터를 통해 개발, 생산하고 홀세일 판매를 병행함으로써 폭 넓은 소비층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소싱 인프라와 노하우가 공급경쟁력으로 직결된다는 방증이다.

소싱 인프라와 공급경쟁력의 상관관계는 K-뷰티산업에서 최적 모델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K-뷰티의 경쟁력은 국내 네트워킹이 수월한 글로벌 소싱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조와 판매가 완벽하게 분리된 산업 시스템하에서 만들어졌다.

한국콜마, 코스맥스와 같은 품질을 담보할 수 있는 제조자가 제품개발부터 생산까지 전담하기 때문에 브랜드 메이커는 콘셉트에 따라 패키지, 홍보 등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제조자에게 재고 부담이 없는 시장 구조는 브랜드메이커와 리테일러까지 3자의 수익을 충족시키는 마진 구조를 만들었다. K-뷰티 업계의 평균 배수율은 원가의 5~6배, 경우에 따라 8배를 매기기도 한다.

그에 비하면 패션은 어떤가. 아직도 많은 신인 디자이너들이 ‘얼추 리테일 가격의 절반’으로 홀세일가를 책정하고, 같은 방식으로 소매 판매에 나선다.

홀세일 비즈니스 모델이 가져가야 할 공급경쟁력은 싸게 만들어 싸게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이어에게 돌아가는 마진의 문제다.

품질은 유지하거나 높이되 생산원가를 낮춰 배수율을 높여야 바이어와 리테일러도 이익을 볼 수 있다. 때문에 공급경쟁력은 근본적으로 물량에 정비례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 물량과 납기, 봉제 숙련도에 따라 선택지가 있는 글로벌 소싱 네트워크는 홀세일 비즈니스 볼륨화의 전제조건이다.

여성패션 편집숍 ‘랩’과 ‘플라스틱아일랜드’를 전개하는 아이올리는 국내 백화점 영업을 통해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작년부터 홀세일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글로벌 유통 체인 코스트코에 ‘랩’과 ‘플라스틱아일랜드’를 공급하는데, 코스트코가 올 겨울 시즌을 위해 수주한 국내 패션브랜드 중 ‘랩’의 수주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랩’은 물량이 늘어난 만큼 리테일 매장과 같은 제품을 공급했던 지난 시즌과 달리 전용 상품을 별도 기획했다. 앞으로 국내외에서 검증된 생산 협력사 네트워크를 꾸준히 넓혀 회전율을 높이는 것이 과제다.

조광희  ‘랩’ 사업부장이사는 “홀세일은 리테일의 포기가 아니라 회전율을 높여 리스크를 줄이는 채널 확장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리테일과 홀세일 병행 브랜드는 늘 수 밖에 없다. 선도적으로 인프라 투자에 나서 공급경쟁력을 높이는 기업,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브랜드가 생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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