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버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뀌면 일어나는 일들
2018-10-15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yourboyhood@gmail.com
홍석우 패션 에세이스트


이제 막 2019년도 봄/여름 시즌 파리패션위크가 막을 내렸다. 뉴욕부터 파리로 이어지는 새로운 계절의 여정에 특히 시선이 몰린 몇 개의 브랜드가 있다. 바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뀐 패션 하우스들이다.

시장의 흐름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지 아닌지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새 얼굴의 등장만으로도 이미 패션계는 들썩인다. 그중에서도 ‘버버리’의 변화는 침착하면서도 흥미롭게 이목을 끈다.


◇대형 패션 하우스, 계속되는 변화

무더위를 뚫고 열린 2019년도 봄/여름 남성복 패션위크의 새로운 화두는 버질 아블로의 ‘루이비통’ 남성복 아티스틱 디렉터 데뷔를 비롯한 대형 패션 하우스의 변화였다. 이는 공식적으로 여성복 패션위크가 시작한 가을에도 이어졌다. 완벽하게 새로운 이름은 아닐지언정, 새 둥지를 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이름만으로도 커다란 파급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초순 뉴욕패션위크가 막 기지개를 켠 시점, ‘버버리’의 새로운 모노그램을 담은 대형 포스터가 서울과 뉴욕, 파리와 도쿄, 런던까지 세계 곳곳의 거리를 장식했다. 리카르도 티시(Ricardo Tisci)가 취임한 이래 처음 선보이는 오프라인 마케팅이었다.


◇ 티시와 새빌의 전혀 새로운 ‘버버리’

조이 디비전(Joy Divison)의 음반 표지부터 ‘캘빈 클라인’과 라프 시몬스 협업까지, 음악과 패션, 예술을 넘나들며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아트 디렉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 피터 새빌(Peter Saville)은 새로운 ‘버버리’의 중심에 있다. 리카르도 티시와 피터 새빌이 새 컬렉션을 앞두고 공개한 작업은 ‘버버리’의 상징과 다름없는 고전적인 체크 무늬 변주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그래픽 정체성(new graphic identity)을 선보이는 일이었다.

패션 하우스이자 브랜드로서 ‘버버리’는 이미 고유명사가 되었다. 종종 사람들은 여느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처럼 창립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는다. 토머스 버버리의 이름 앞 글자를 형상화한 ‘TB’ 모노그램은 다소 보수적인 ‘버버리’의 그래픽 디자인을 생각하면 파격 그 자체다.

둘은 새로운 로고에 창립자의 이름을 넣은 후, 트렌치코트는 물론 가방과 벨트의 금속 장식과 남성복 양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 새 로고를 넣었다. 리카르도 티시가 맡기 ‘직전’인 2018년도 가을/겨울 시즌, 이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최고경영자 CEO까지 역임한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업적을 생각하면 제법 대척점에 섰다.

2001년 디자인 디렉터에 취임한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첫 번째 ‘버버리 프로섬’ 컬렉션은 당시만 해도 ‘지루하다’고 평가받은 버버리 체크 무늬를 밝고 화사하게, 커다랗게 확대하거나 줄여서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크리스토퍼 베일리의 전략으로 브랜드는 활력을 되찾았고 유럽과 미국, 일본 등 중국을 비롯한 신흥 아시아 시장의 돌풍을 일으키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또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자신의 마지막 컬렉션에 이르러 스트리트 웨어의 언어를 받아들이며 오래된 로고와 클래식 모노그램을 변형한 복고풍 실루엣으로 매장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리카르도 티시는 과거로 돌아간 버버리를 한 시즌 만에 고스란히 지워냈다.


'버버리'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리카르도 티시'

◇ 여성복은 느낌표(!), 남성복은 물음표(?)

리카르도 티시의 새로운 ‘버버리’ 컬렉션이 공개되기 직전까지, 그가 ‘지방시’에서 이룬 업적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가 어떤 컬렉션을 보여줄까 추측하기에 바빴다. 본인의 언급처럼, 그는 지금 하이엔드 스트리트 웨어 유행을 시작한 인물이다. 험상궂은 로트와일러 프린트의 커다란 스웨트 셔츠, 제이지와 카니예 웨스트와의 협업은 ‘힙합’ 문화가 패션계 주류와 제대로 맞물리기 시작한 시발점이자, 동시대 고급 기성복 패션이 스트리트 웨어와 영향받기 시작한 초기 사례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처음 ‘지방시’를 맡았을 때처럼 다소 고전적이면서 오롯이 현대적인 여성복을 내세웠다. ‘고전적’이라는 표현과 ‘현대적’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상충하며, 그 의미 역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지만, 적어도 요즘의 1990년대 복고풍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만일 그가 요즘 유행에 맞춰서 ‘버버리’를 바꾸고자 했다면, 솔직히 못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티시는 하우스에 새 물결을 일으키고, 좀 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기 위하여 브랜드의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략을 취했다.

‘잘 만든 옷 한 벌’의 가치를 방대한 아이템과 스타일로 보여주고, 마치 1960년대와 70년대 상류층 저택 파티에 있었을 법한 스타일을 정갈하게 가다듬어 제시했다. 소위 ‘잇백’ 을 터트리거나, 패션 키즈들이 열광할 만한 아이템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나의 아이템이 유독 눈길을 끄는 컬렉션은 아니었지만, 한 벌 한 벌이 럭셔리라는 단어에 걸맞은 세련된 감각을 드러냈다. 순간 ‘지방시’의 ‘로트와일러 프린트’ 스웨트셔츠 대신, 주문 맞춤복에 가까웠던 초기 여성복 컬렉션이 겹쳤다. 애초에 그는 하이엔드 스트리트 웨어의 선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패션 하우스가 어떻게 하면 더 장기적인 시야에서 브랜드의 층위를 올릴 수 있는지, 더 풍성한 이야기를 컬렉션 안에 담아낼 수 있는지 아는 ‘고전적인’ 패션 디자이너였다.

여성복의 획기적인 변화만큼 남성복 역시 극명하게 달라졌다. 실제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에 얼마나 큰 변화가 올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레트로’ 버버리를 사려면, 아무래도 이번 가을/겨울 시즌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여성복이 리카르도 티시가 구상한 ‘버버리’의 새로운 여성상을 대변한다면, 남성복의 변화는 솔직히 조금 힘이 빠지는 모양새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가 ‘버버리’의 새로운 남성복을 보면서 과거 ‘지방시’ 컬렉션을 떠올렸을 것이다. 어글리 스니커즈와 새빨간 트레이닝 팬츠, 팔꿈치에 절개를 넣은 긴소매 셔츠와 브랜드 이름을 넣은 트렌치코트, 그래픽 콜라주를 넣은 재킷은 ‘버버리’로서 새로웠지만, 사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실제 고객들의 반응은 몇 달 후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다.


◇ ’유행에 반하는’ 리카르도 티시의 클래식 ‘버버리’

브랜드의 수장이 바뀐다는 의미는 적어도 고급 기성복 업계에서 누구도 막기 어려운 ‘전권’을 쥔다는 뜻과 같다. 패션 하우스의 경영자들은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지닌 중의적인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업계 모두가 클래식을 좋아하고 열광한다고 말하지만, 한 끗 차이로 동시대적 요소와 유행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하면 순식간에 ‘한때’ 잘 나간 브랜드로 전락한다. 몇 년 전까지 세계 각지에서 열광한 유행은 모바일 시대 진입과 동시에 더불어 더 빨리 타오르고, 그만큼 쉽게 시들해진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혹은 ‘아티스틱 디렉터’로서 패션 하우스의 디자인 전권을 쥔 인물의 권한은 그래서 막강하고, 책임감 또한 막중하다.

하이엔드 스트리트 웨어의 시작을 연 리카르도 티시는 지금 몇 년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옷을 만드는 대신, 패션 하우스로서 ‘버버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그사이에는 급부상하는 젊고 힘 있는 고객과 유명인사를 위한 마케팅 역시 함께 펼쳐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비슷한 시기에 새롭게 수장이 바뀐 여느 패션 하우스와 다른 지점이 눈에 띄었다. 리카르도 티시는 자신과 ‘버버리’의 새로운 출발에 막강한 팔로워로 무장한 연예인과 유명 인사 대신, 이제 막 재능을 드러내는 젊은 창작자들을 초청했다. 처음 ‘버버리’ 컬렉션에 참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한국의 젊은 음악가, 서사무엘은 “러시아에서 온 무용수 친구도, 자신도, 또 그 자리에 초대 받은 열여섯 명의 인물들 모두 이런 (컬렉션 초대) 자리는 처음”이라고 했다.

지금보다 더욱 고급 기성복을 지향하면서 어느 때보다 독립적인 컬렉션이었다는 것이 이번 ‘버버리’ 컬렉션의 사적인 결론이다. 리카르도 티시가 던진 ‘유행에 반하는’ 화두가 업계 전반에 번질지, 아니면 ‘버버리’만의 작은 움직임이 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창업주 토머스 버버리의 앞 글자를 따 만든 '버버리'의 새로운 'TB' 모노그램